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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Feb 05. 2021

지긋지긋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feat. 코끼리를 떠올려봐


반추 :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함. 또는 그런 일.



작고 사소한 사건이었는데 지나간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지금 이 순간, 멀쩡하고 소중한 시간까지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아이와 길을 가고 있는데 이유 없이 내 팔을 쎄게 치고 지나간 그 아저씨.

급하게 어디를 가느라 혼자 택시에 탔는데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 문을 열고 타버려서 당황했던 일.

화장하면서 눈썹 그리기만 빠뜨리고 나간 걸 집에 돌아와서 뒤늦게 깨달은 일...


기분은 껄끄럽지만 사는 데 지장 없는 일인데도 그 순간의 감정적 타격이 컸는지 내게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뒤늦게 분한 복수심이 들지만 이제는 갚아줄 상대가 없어 화가 치미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들 조용히 집중해야 할 때 자주 떠오르고, 특히 려고 누우면 떠올라 밤잠을 설치는 날들도 많다.


지나간 과거는 아무<반추> 해도 바뀌지 않는다.

그건 알지만...

지금 와서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했어야 해!' 라며 상상의 시뮬레이션을 수없이 돌린다. 자신이 왜 이리 그 일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분석해보기도 한다.

그러다 지쳐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이제 그만 내려놓자!' 라며 강제적으로 기억을 차단하려 해 보지만, 흰곰을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는 역설적 원리에 의해, 이 또한 실패하기가 일쑤다.


물론 의미 있고 중대한 사건은 심리상담실과 같은 안전한 장소에서 힘들더라도 프로세스를 복기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다 의미 있지는 않다. 습관적인 반추로 인해, 사소하고 불쾌한 기억이 머릿속을 수시로 침범할 때 이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1. 그때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다듬는다.


과거를 반추하는 일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대개는 그렇지가 않다. 주로 불쾌한 일들을 반추하고 우울로 빠져들게 되는데, 이는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자신을 탓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주는 것과 같다.


과거의 일이 자꾸 떠오르는 건 미해결과제로 남은 그 일을 완결 짓고 벗어나고픈 마음에서 일어난다. 아마도 우리 마음이 고통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서둘러 기억을 정리하다가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감정이 자꾸만 고개 내미는 탓이다. 이러한 해결 욕구 자체는 긍정적인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반추라는 방법은 부정적인 효과를 낸다.


급한 대로 꿀꺽 키고 충분히 소화시키 못했던 자신의 해묵은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고, 마음을 토닥이는 일이 우선이다.

어떤 부끄러운 일도, 어떤 잘못한 일도 그 고통을 위로받지 못할 것은 없다. 스스로를 벌주는 행위를 그만두고, 이제는 뒤에 숨어있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주도록 하자. 공감과 자비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자세가 언제나 가장 먼저다.



2. 괴로운 기억은 단단한 상자 속에 넣어두는 상상을 한다.


머릿속에 단단한 나무 상자를 하나 떠올린다.

그 속에 불필요한 생각을 집어넣고 뚜껑을 쾅 닫아버리는 장면을 그려본다.


안타깝게도 반추는 매우 끈질긴 것이어서 이렇게 해도 조금 있다 보면 또 같은 생각에 푹 빠져있는 나를 보게 된다...


러면 또 쿨하게 상자에 집어넣고 닫는 모습을 상상한다.

"필요 없어! 꺼져!"라고 외쳐주면서.


감정을 다독이고 거칠게 내려놓는 작업을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그 생각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혹시나 다시 꺼낼 수 있는 상자를 선호하지만, 거대한 코끼리가 나타나 밟아 부수는 상상을 해도 좋고, 모래 위에 쓰고 나서 바람에 날려버리는 상상을 해도 좋다. 그렇게 하고 나면 다른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볼 '여유'를 얻게 된다.


사람은 떠오르는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

다만,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억지로 '통제'할 수는 없어도 그것에 힘없이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통제감'은 가질 수 있다.

반추에 압도되면 자신이 매우 형편없이 느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데, 그럴수록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만들어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잡생각이 유난히 많은 아이는 이렇게 한 번 물어보세요.
"너 지금 머리에서 안 지워진 생각이 남아 있니? 지금도 무슨 생각이 떠오르니?"
아이가 "아~ 그게..."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해요.
그럴 때 "밀어, 밀어, 저리 밀어버려"라고 말해주세요.
아이가 "안 밀려요"라고 하면,
"그래도 밀어봐. 꽉꽉 밀어, 보자기에 싸놔"라고 알려주세요.
마지막으로 아이한테 "다 쌌어?"라고 물어도 보세요.
아이가 "그런데 자꾸 튀어나와요"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 때는 "눌러, 눌러봐"하면서 아이에게 정말 잡생각을 누르는 시간을 좀 줍니다.
좀 지나서 아이가 "됐어요"라고 말하면 "이제 수학 숙제를 해보자"라고 하세요.
약간의 시간을 가지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효과가 의심스럽지요?
일단 시도해보세요.
집중하는 데 의외로 도움이 됩니다.


<오은영의행복한아이> 블로그에 실려있는 칼럼 중에서도 아이의 집중을 돕기 위한 방법으로 불필요한 생각은 주머니에 잠시 담아두라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러한 이미지화 방법은 생각이 넘쳐 산만한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위의 1단계처럼, 먼저 충분히 이야기하고 해소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신체 감각 활동에 집중하면서 마음을 환기한다.


◈ 라디오스타에 소개된 현아의 안구 훈련 방법


작년 여름 가수 현아 님이 <라디오 스타>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용기 있게 고백한 적이 있다. 치료받으며 불안한 생각이 떠오를 때 벗어나기 위해 효과 있었던 안구 훈련 방법을 소개해주었는데, 아마도 EMDR이라는 트라우마 치료 기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 Reprocessing; 안구 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 요법)은 고통스러운 기억의 단편을 떠올리는 동시에, 안구운동과 같은 양측성 자극을 주어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을 활성화시켜 기억의 처리가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났던 고통스러운 경험의 기억이 현재까지 계속해서 일상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둔감화시키고, 적응적인 방향으로 재처리하도록 돕는 치료방법이다[출처 : 한국 EMDR 협회].



*책이 아닌 <브런치북>이기에 안내해드릴 수 있는 영상 클립!




◈ 그라운딩 기법


그라운딩(grounding)은 불안 발작이나 플래시백 증상이 왔을 때 신체 감각에 집중하여 주위를 환기하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트라우마 치료 기법 중의 하나이다.


트라우마 증상이 나타났을 때 그라운딩을 혼자 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전문가와 훈련 세션이 필요하지만... 일부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챙김을 위해 해 보기에 비교적 간편한 활동들로서 효과도 좋다.


이를테면 산책 중에 습관처럼 생각에 잠기는 대신, 걷는 감각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걸음의 수를 세어보고, 걷는 속도를 느껴보고, 땅에 발을 딛는 느낌이나 다시 떼는 느낌 등에 관심을 갖는다.

또는 주변의 소리에 집중할 수도 있다. 새소리? 개 짖는 소리? 교통 소음? 사람들의 대화가 들린다면,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들어본다.


손을 물에 담그고서 물의 온도를 느끼고, 손끝, 손바닥, 손등의 감각을 각각 느껴보도록 한다.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물고, 녹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시간을 재보거나, 얼음이 입 속에서 녹는 느낌에 집중해볼 수도 있다.


오감을 활용하는 5-4-3-2-1 기법으로 주의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



5가지 보이는 것 말하기
4가지 느껴지는 것 말하기
3가지 들리는 소리 말하기
2가지 맡을 수 있는 냄새 말하기
1가지 맛 말하기


만약 다섯 가지 감각을 모두 사용하는 것이 힘들다면,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해 볼 수도 있다.

사람은 외부 감각에 집중하는 순간, 내부의 생각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자신이 또다시 반추하고 있다 싶으면 이를 알아차리고 멈춰서 마음을 환기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5가지 색깔 말하기
눈에 보이는 4가지 모양 말하기
눈에 보이는 3가지 부드러운 물체 말하기
눈에 보이는 2명의 사람 말하기
눈에 보이는 1권의 책 말하기


물론 간단한 신체 감각 활동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쉽게 실천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안구 훈련을 소개한 현아도 이것이 얼핏 쉬워 보이지만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아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런 활동은 고통스럽지 않은 평소 상황에서 미리 연습해두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변화는 성실한 반복에서 온다. 반추로 이미 굳어진 습관이 있어 몸에 새로운 습관을 들이고 변화하기가 참 어렵지만, 대신 잘 익히고 나면 그 관성으로 오랫동안 안정되게 도움받을 수가 있다.


사람은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고, 특히 생각은 생각으로 다스리기가 어렵다. 그보다 방향을 틀어 감정에 집중하거나 신체활동을 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그렇게 '조절'하면서 살아가면 괜찮다.

무의미한 반추로 괴로울 때, 다양한 방법들로 잠시 틈을 만들어주면 마음이 드디어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제야 로운 생각이 펼쳐지게 된다.



(만약 심각한 트라우마 사건을 겪고 재경험에 시달리거나, 강박이 심해서 스스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신경정신과에 방문하여 정식 진단을 받고 적절한 약물 처방과 전문적인 심리치료를 지속적으로 병행하면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라운딩에 관한 자세한 방법들은 아래의 블로그 포스팅에 정리해두었으니 참고하세요!)

* 그라운딩 기법 : 신체적 기법 11가지

* 그라운딩 기법 : 사고 분산 기법 10가지, 진정 기법 9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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