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산책자'라는 사부작 거리는 단어를 좋아한다. 지난 일 년 동안 꾸준히 한 취미 겸 운동으로 나는 산책을 꼽곤 한다. 느슨한 속도로 걷다가 공원에 다다르면 적당한 벤치를 찾아 잠시 숨을 고르고 스트레칭을 한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식으로 5킬로를 걷는 데 보통 1시간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겉으로는 산책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아니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대부분이다. 말이 산책이지 취미는 생각하기(feat. 산책)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산책을 하는 동안에는 <김혜리의 필름클럽>이나 <책, 이게 뭐라고!>, <서늘한 마음썰> 같은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혼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기 일쑤지만 그러다가 불현듯 장보기 리스트 같은 게 생각나면 다급하게 핸드폰의 메모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동안 찍기만 하고 묵혀둔 사진은 또 얼마나 많은지 장을 본 뒤엔 오늘은 기필코 이 사진들을 추리고 정리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장보기와 사진 정리를 아예 묶어서 내일로 미룰까 잔머리를 굴리기도 한다. 도서 관련 팟캐스트를 듣다가 어제 잠들기 전 읽은 에세이집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에서 '글 한 꼭지를 끝냈다. 제목을 뭐라고 붙이나. 자고 나면 생각이 나겠지. 밤이 선생이다'와 같은 글귀를 떠올리며 문장이 정말 너무너무 하다고 감탄을 하기도 한다.
'생각'의 관점에서 보면 수영은 산책의 대척점에 위치했다. 처음 수영장에 간 날은 음파 음파 호흡법에 따라 숨을 쉬느라 다음 날에는 종아리가 아니라 허벅지로 발차기를 하느라 그다음 주에는 팔꿈치를 굽히지 않고 팔을 쭉 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에 들어가면 당장 해야 할 게 너무나도 많았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들은 썰물처럼 저만치 물러가곤 했다. 지금 나는 동네 수영장에 와있고 반대편까지 자유형으로 헤엄을 쳐서 가야 하는데 다른 문제가 무슨 상관이람. 가끔 배경음으로 강사의 목소리가 들려올 뿐 그곳에는 오직 나와 수영장, 킥판만이 존재했다. 전 국가대표 김연아 선수도 그러지 않았나.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고. 아무렴, 수영을 하는 동안 생각이라니. 그건 사치죠.
생각하는 걸 좋아해서 산책을 즐겼지만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수영 시간이 좋았다. 가령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뭘까'와 같은 진지한 고민부터 '오늘 저녁에는 뭐 먹지?', '이번 주에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한다던데 엄마랑 같이 보러 가야겠다' 같은 소소한 생각마저 수영하는 동안에는 깡그리 잊혔다. 대신 그곳에선 규칙적으로 호흡하고 배운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려 애쓰며 반대편까지 빨리 도착하기 위해 온몸을 바쁘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머리가 아니라 내 몸에 한껏 집중하여 주어진 시간 동안 수영을 하고 나면 피곤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회사에서 업무를 할 때도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보단 규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이라도 움직여주는 게 오히려 업무 효율이 높아지는 것처럼 24시간 중 50분이란 수영 시간이 확보되자 일상생활에도 활기가 더해졌다. 몸을 움직이는 시간은 동시에 머리가 쉬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50분, 9시부터 9시 50분까지를 나는 '수영하는 시간'이라고 명명하지만 동시에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크고 작은 근심, 걱정은 고이 접어두고 세상만사로부터 잠시 로그아웃하여 오로지 레인 끝에 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해지는 시간.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