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수영 일기 02화

우리가 수영장에 갈 수 없는 이유

나머지는 내 몸이 다 한다

by Ronald

운동에도 진입장벽이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수영은 그 등급표에서 어디쯤 위치할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스, 그리고 진입장벽이 낮은 달리기부터 진입 장벽이 높은 서핑/다이빙/골프까지 줄을 세워보면 수영은 그래프의 중간쯤에 위치할 것이다. 관심 정도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주관적일 수 있는지는 새로운 아이템을 구입하려 결심했을 때나 무언가를 막 시작할 때를 생각해보면 한결 이해가 쉽다. 슬슬 찬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작년부터 SNS에서 눈여겨본 막스마라의 테디베어 코트 스타일을 올 겨울에는 나도 기필코 하나 구입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길거리에 모든 테디베어 코트가 내 레이더망에 포착되기 시작한다. 그 인기가 어마어마해서 주변 친구들은 물론 이쯤 되면 세상에 나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이 아이템을 갖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수영을 시작하고 나자 깨닫게 된 건 주변에 수영을 다녔거나 현재 다니고 있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쯤 되면 수영은 진입장벽이 낮은 거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급한 판단은 고이 접어두자. 지금부터 우리가 수영장에 갈 수 없는 이유를 차근차근 살펴볼 테니.


운동의 진입장벽은 크게 필요한 장비와 접근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필요한 장비가 많을수록 그리고 그 장비의 시작가가 높을수록 진입 장벽은 당연히 높아진다. 반대로 접근성이 좋을수록 장벽의 턱은 낮아진다. 달리기처럼 운동화 끈을 꿰어 매고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가능한 운동이 있는 반면 프리다이빙처럼 수심이 10M, 20M나 되는 시설을 찾아가야 할 때는 그만큼 시간과 비용이 더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수영장의 경우 마음먹고 찾아보면 사설 시설부터 구민센터까지 생각보다 동네에서 수영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비용이 저렴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구민센터의 경우 등록이 조금 힘들 뿐이다.


(구민센터 기준으로) 동네 수영장에 등록하기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동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동네는 신규 회원 접수일에 새벽부터 50번이 넘는 대기표를 뽑고 기다려야 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일단 첫 달 등록에 성공하기만 하면 다음 달부터는 기존 회원 재등록이란 치트키를 통해 수월하게 등록이 가능하니 일단 수영을 하기로 마음먹은 예비 수영인이라면 하루 정도는 눈 딱 감고 아침 일찍 수영장으로 향하자. 게다가 초급반에 등록한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3개월 이내에 관두기 때문에 중급반부터는 등록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수영장 등록에 성공하면 다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관문은 바로 마음에 드는, 수영복 구매하기다. 수영은 어느 운동보다 몸이 가벼운데 그건 필요한 장비가 하나도 없어서라기 보단 머리부터 발 끝까지 입고 있던 옷을 전부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규 회원 등록에 성공한 뒤 디데이까진 일주일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실내 수영에 적합한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 수영복을 찾기 위해 나는 국내외 사이트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원피스 수영복 구매가 처음이었던 나는 여러 사이트를 보며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원피스 수영복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패스트백, 레이서백, 크로스백, 컷아웃 등등 쇼핑몰에서 상세 정보를 유심히 살펴보며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벌의 원피스 수영복을 입어보고 또 갈아입었다. 생각보다 국내에선 마음에 드는 패턴을 찾기 어려워 해외 사이트로 눈을 돌리기도 했지만 배송기간과 사이즈 재고의 문제로 결국 솔리드 컬러의 패스트백 원피스를 국내 사이트에서 구입하였다. 수영복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으로 시작해 깔맞춤 한 수모와 수경까지 구입하면 준비는 98% 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빈 몸뚱이를 메꾸고 저항을 줄이기 위해 수모를 쓰고 시야 확보를 위한 수경까지 착용해야 하니 수영에 필요한 장비가 적지만은 않은 셈이다.


수영 강습에 적절한 아웃핏에 대해 첨언을 하자면 실내 수영장에서 강습을 받고 수영을 하기엔 원피스 수영복이 가장 적합하다.(아직까지 비키니 입은 분들은 보지 못했다.) 종종 초급반에 휴양지에서나 입을 법한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나타나시는 분들이 있는데 강습을 받다 보면 아무래도 조금 거추장스러운 부분이 있어 중간에 일반적인 원피스 수영복으로 갈아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수영복을 착용하는 게 어색해 래쉬가드를 입고 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강습용으론 래쉬가드도 당연히 오케이. 하지만 기존에 구입한 래쉬가드가 있는 게 아니라면 강습용으론 원피스 수영복을 추천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목욕탕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탈의실과 샤워실의 낯선 풍경이 어색하고 쑥스러워 수영장 출입을 주저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그곳은 강습을 받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전쟁터와도 같은 곳이라 아무도 나를 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으니 크게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런 걱정을 했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걱정일랑 붙들어 매고 수영장으로 갑시다, 여성들이여.


동네에서 접근성이 용이한 수영장을 찾아 등록하고 수영복 구매 등 일련의 미션을 통과했을지라도 오늘 내가 부득이하게 수영장에 가지 못할 이유는 어림잡아 오조 오억 개쯤 된다. 겨울이 되면 가뜩이나 이불속에서 나오기도 힘든데 수영장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고 어제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해서 오늘 하루쯤은 수영을 건너뛰는 게 오히려 피로감을 덜어줄 것 같다. 어떤 날은 수영 갈 생각을 하니 안 아프던 몸이 갑자기 아픈 것도 같은데 이게 과연 꾀병일까 아닐까 본인 스스로도 헷갈리는 경우를 맞닥뜨리게 된다.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제모도 수시로 나를 괴롭히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 일단 수영장에 가기만 하면 내 몸 깊숙이 있던 스위치가 탁 하고 켜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일단 그곳에 가기만 하면 나머지는 내 몸이 다 한다. 우리가 수영장에 갈 수 없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사실이 때론 오조 오억 개의 핑계보다 힘이 세다.



St Kilda Beach, VIC,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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