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2.
아침 일찍 쿰발가르 투어 동행자를 구했다는 나라얀 사장의 전화가 반갑다. 2,000루피 택시투어가 부담스러웠는데 잘된 일이다. 열흘간 혼자 여행하는 한국인 아가씨 Seo와 변호사 은퇴 후 세계유람을 하는 스페인 중년 남자 Paco 씨가 동행이다. 새벽에 슬리핑 버스로 우다이푸르에 도착한 Seo는 늦은 밤에 조드푸르로 간다고 한다.
8시 40분에 출발한 택시는 2시간이 걸려 우다이푸르에서 북서쪽으로 82km 떨어진 메와르 왕국의 쿰발가르 요새에 도착했다. 쿰발가르 요새는 「2013년 인도의 30번째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라자스탄 구릉 요새의 하나이다. 라자스탄 구릉 요새는 8~18세기에 걸쳐 라자스탄에서 번성했던 왕국들 중에 6개 도시에 있는 요새 유적인 쿰발가르 요새(Kumbhalgarh Fort), 암베르 요새(Amber Fort), 자이살메르 요새(Jaisalmer Fort), 치토르가르 요새(Chittorgarh Fort), 란탐보르 요새(Ranthambore Fort), 가그론 요새(Gagron Fort)를 말한다. 다채로운 구릉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된 이 요새들은 라지푸트 왕국들의 통치기반과 정치적 독립성을 반영한다.
해발고도 1,100m에 15세기에 건설된 쿰발가르 요새 정면의 성벽 두께는 4.6m이고 성곽의 길이는 36㎞로 치토르가르 요새 다음으로 긴 성이다. 메와르 왕조의 강력한 통치자였던 마하라자 프라탑(Maharana Pratap Singh)의 출생지이기도 하여 인도인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택시에서 내리니 우선 다메크 스투파처럼 생긴 둥근 여러 개의 치가 돌출되어 있는 거대한 성벽이 눈을 사로잡는다. 직사각형의 돌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성벽을 보면 참으로 단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성곽이 아닌 적에게 위엄을 줄 수 있도록 축조한 방법이 감탄스럽다. 난공불락의 산성으로 보이지만 무굴제국의 악바르와 자항기르, 영국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다.
적의 코끼리와 말들이 빠르게 오르는 것을 막기 만든 구불구불한 경사로를 따라 쿰발가르 요새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바달 마할(Badal Maha)을 향해 오른다. 성벽을 보수하기 위해 돌을 나르고 있는 한 무리의 노새들이 힘겹게 보인다.
바달 마할은 라지푸트 양식으로 지은 2층의 건물로 시티 팰리스나 암베르 팰리스 등 다른 지역의 궁전들에 비해 소박하고 단조롭다. 궁전은 왕이 거주하는 마르다나(mardana)와 여왕이 거주하는 제나나(zenana)로 분리되어 있다. 제나나의 방에는 검은 코끼리 무리, 악어, 낙타가 그려져 있다. 마하라나가 탄생한 곳으로 믿어지고 있는 잘리아 여왕의 궁전인 잘리아 카 마리아(Jhalia ka Malia)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요새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구름 궁전으로 불리기도 하는 바달 마할에서는 요새 전체와 주변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우기에 왔다면 녹음이 산과 계곡을 뒤덮고 있는 구름 밑의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온통 황량한 거친 산맥과 길게 뻗은 성벽만이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다시 입구의 하누만 폴(Hanuman Pol)로 내려오면 근처에 베디 사원(Vedi Temple), 파르쉬와나트 사원(Parshwanath Digamber Jain Temple), 마하데브 사원(Neelkanth Mahadev Mandir)이 있다. 꼭대기에 커다란 돔이 있는 팔각형 형태의 3층으로 지어진 베디 사원은 요새를 지을 때 스스로 제물이 된 순교자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스 사원처럼 지어진 또 다른 자이나교 사원인 파르쉬와나트 사원을 지나면 쿰발가르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경받는 곳인 시바에게 헌정된 마하데브 사원이다. 커다란 원형 돔, 24개의 굵은 기둥, 사방이 뚫린 성소의 안에는 1.5m쯤 되는 검은 돌로 만든 시바의 링가가 있다. 메와르 왕국의 전설적인 왕인 마하라나는 여기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으며, 그가 앉았을 때 눈의 높이가 링가와 같은 높이이었을 정도로 키가 컸다고 한다.
천천히 요새 안의 마을도 살펴보고 싶지만 기사가 재촉한다. 라낙푸르 자이나교 사원으로 가는 길은 쿰발가르로 올 때보다 더 험난하다. 구불구불 좁은 골짜기 길 주변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산골마을이라 쳐다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언제 맞은편에서 차가 튀어나올지 겁난다. 안전벨트를 했지만 헐렁거리는 이 차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자동차로 소문난 타타자동차이다. 언덕길이나 구부러진 길에서 클랙슨을 크게 울리는 기사가 고맙다.
여행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이 기사가 이끄는 대로 밀밭에 물을 대는 물레방아 수차에 있는 식당(Amrai Restaurant)에 왔다. 외국인을 상대하는 식당이라 시내보다 고급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다. 개울을 건너오는 다리에 앉아 있는 파란색 물총새 한 마리가 분위기를 더해준다. 밀밭에 둘러싸인 식당의 몇 개의 테이블에는 우리처럼 쿰발가르 요새를 들러 자이나교 사원으로 가는 서양인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밥, 과일, 짜파티, 달, 치킨커리, 가지, 감자, 스위트로 구성된 단출한 뷔페식 음식으로, 인도 음식의 독특한 향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지 인도 음식이 불편했다는 Seo도 맛있게 먹는다. 바가지를 쓸까 걱정했지만 시내보다 조금 비싼 400루피이다. 이 정도의 가격에 이런 수준의 식당이 숙소 근처에 있다면 자주 갈 수 있을 것 같다.
Paco 씨는 눈썰미가 좋아 식당 앞의 수차가 손님을 끌기 위한 이벤트임을 단번에 알아챈다. 개울 앞 공터에 차량이 도착하면 노인은 소에 채찍을 하여 손님의 이목을 끌고, 손님이 그냥 가거나 식당으로 들어오면 소를 멈춘다. 연자방아처럼 소가 둥글게 돌면 수차도 따라 돌면서 개울물을 밀밭에 보내는 것이지만, 개울가에는 물을 퍼 올리는 모터로 설치되어 있다. 비록 장사 수완이지만 유쾌하다.
쿰발가르에서 출발한 지 3시간이 지나서야 라낙푸르 자이나교 사원에 도착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아디나타(Adinatha)에게 봉헌된 사원으로 1446년에 착공하여 5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17세기에 아우랑제브 황제에 의해 파괴와 약탈되어 한동안 잊혔으나 20세기에 들어 다시 재건했다고 한다. 인도 종교의 0.4%를 차지하고 있는 자이나교는 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브라만의 권력을 비판하며 창시된 종교로서, 불살생, 불간음, 무소유, 금욕과 고행을 강조하고 있다. 브라만교의 업, 윤회사상,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힌두교나 불교처럼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쪽 출입구로 들어서면 웅장한 궁전 같은 사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당시 사람들은 신들이 전차를 타고 다녔다고 믿기 때문에 사원을 날아다니는 전차를 뜻하는 비마나(Vimana)의 무늬로 설계했다고 한다. 정면에서 가만히 보면 살짝 비행기처럼 보인다. 흰 대리석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3층으로 지어진 사원의 정면 중앙 계단을 올라 출입구에 들어서니 눈앞이 밝아지면서 아름다운 조각으로 뒤덮인 기둥이 줄지어 있는 황홀한 광경이 나타난다.
사원의 겉모습도 아름답지만 내부의 예술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방향으로 눈을 돌려도 큰 기둥과 작은 기둥, 굵은 기둥, 가는 기둥과 마주친다. 전체가 하얀 대리석의 섬세한 레이스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는 사원에는 1,444개가 넘는 기둥들이 천장을 지탱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들을 세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둥들은 하나하나가 다른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다. 사람, 코끼리, 꽃, 기하학적 무늬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기둥의 조각들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완벽한 예술작품들이다. 기둥의 색이 낮 시간 동안 빛에 따라서 황금색에서 연청색으로 변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지만 짧은 시간 동안 관람하다 보니 변화 모습을 알아채기 어렵다. 바닥부터 꼭대기에까지 온통 호화로운 조각으로 장식된 기둥을 바라보다 보면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한 황홀한 천정에 눈이 멈춘다. 웅장한 사원에는 천장에 신의 세계를 묘사한 독특한 디자인이 있는 80개의 돔이 있다고 한다.
사원 정중앙의 본실은 네 방향으로 출입구가 열린 구조로 설계되었으며, 그 안에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4개의 아디나타 신상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그 때문에 많은 기둥에도 불구하고 참배객들이 시야를 방해받지 않고 신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신상 쪽을 향해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경비원에 의해 바로 제지를 당한다. 신자가 아닌 관광객들은 신상에 접근할 수도 없으나 사제들이 기부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원하면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보인다.
내면의 평화, 비폭력, 관용 등 경전의 가르침과 다양한 설교자들의 삶을 통해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이야기가 신의 작품인 듯 조각되어 있는 천정과 기둥, 벽면을 보고 있으면 비록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천국이 존재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빠진다. 라낙푸르 자이나교 사원은 뛰어난 예술 감각과 독특한 건축 스타일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그동안 거쳐 왔던 인도의 문화유산들을 능가한다. 타지마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품들은 인도인의 압도적인 예술 감각을 느끼게 만든다.
고속도로를 이용했지만 우다이푸르로 돌아오는 데는 77km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2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말만 고속도로이지 우리의 국도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어느새 어둠에 잠긴 평화롭고 고요한 피촐라 호수에 비친 우다이푸르의 또 다른 모습은 매혹적이다. 아름다운 우다이푸르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