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남자는 인천에서 보령으로 발령이 나서 배를 타고 있을 때였다. 이사 날 역시 역마살 남자는 근무 때문에 이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첫째는 만 4세, 둘째는 이제 막 돌을 넘기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이사야 이삿짐센터에서 짐도 싸고, 풀고 다 하겠지만.. 다들 알 거다. 이사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시어머니가 이사를 도와주러 멀리 광주에서 올라오셨다. 서울에 사는 나의 막내 작은 아빠도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이사할 집으로 날 도와주러 오셨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들이었던 사촌동생 둘이 아이들을 돌봐주었다.이삿짐이 새 집으로 들어갈 때 위치를 지정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다.
사촌동생들은 아이들에게 과자를 줘도 되는지, 나가서 놀아도 되는지 묻느라 날 찾고, 작은 아빠와 시어머니는 이 물건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느라 날 찾는다.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몽땅 데리고 놀이터로 나가고 나서야 조금 조용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전에 다른 곳에 있었다.
우리의 첫 집이었던 만큼 수리를 한 상태에서 이사청소를 맡겼는데, 인천에서 직접 와볼 수가 없어 그냥 전적으로 업체를 믿었다.
그러나 웬걸.. 청소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짐이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전에 시어머니와 나는 이방 저 방 걸레질을 하느라 허리를 펼 새가 없었다.
청소업체와 한바탕 긴 통화를 하고.. 결국 작은 아빠의 중재로 타협할 수 있었다. 1원도 지불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직접 와서 확인을 했다면 이렇게 되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아주머니들 일당을 줘야 한다고 사정사정하던 업체 사장의 떨리는 목소리에 순간 동정심이 일었다.
이사업체에서 짐을 옮기다가 베란다에 새로 깔아놓은 장판을 찢어놓았다. 크진 않았지만, 새것처럼 해놓은 집에 흠집이 어찌나 속상하던지..한번 생긴 흠집은 그 집에서 이사나오는 순간까지 늘 눈에 밟혔었다.
관리사무소에 입주자등록 및 차량등록도 하고, TV, 인터넷 연결도 그날 이루어졌다.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도 하고..
이삿짐은 다 풀어져 자리를 잡아가긴 했지만, 옷장을 새로 사야 하는 상황이라 옷장 안에 들어가지 못한 옷들이 방 한구석에 한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한 달 정도가 지나서야 집다운 집으로 모든 짐정리가 마무리되었다.
이사가 너무 힘들어 이제는 할 일이 없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는 4년 뒤 커가는 아이들에게 더 큰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같은 단지의 지금 집으로 한번 더 이사를 하고 지금껏 살고 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은 첫 집을 구매하셨다.
나는 그 집에서 15년을 살다가 지금 학교에 취업을 하며 독립했다. 그때 얻었던 아주 작은 첫 원룸에서 1년을 채 못 살고 좀 더 넓은 원룸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2년 전세계약을 다 채운 후 첫째를 데려오기 위해 얻은 집은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빌라 1층. 그 집에서 역시 1년을 못 살고 대출을 받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둘째 출산을 앞두고, 인천관사로 이사를 했고, 복직을 하면서 지금 사는 곳에 첫 집을 샀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짐은 늘어났고 이사비용도 늘었지만, 이사를 자주 하니 가구를 절묘하게 배치하는 요령도 생기고, 테트리스하듯 물건들을 적재적소에 넣고 나면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조금씩 나아지는 살림살이에 고생스럽지만 보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