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인석 Aug 12. 2023

아내의 매화

TEXTIST PROJECT

1.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동생과 함께 살았던 1년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기간을 혼자 살았다. 혼자의 삶은 불편함이 없고, 인간 특유의 자유에 대한 지향을 성취하기 유리하다.  

 나 또한 혼자 오래 살았고 개인성과 독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혼 이후의 생활에는 적응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점과 별개로 수십 년간 다른 삶을 살던 이와 한 공간에서 지내게 되면, 재밌는 일들의 발생 빈도도 늘어난다. 특히 아내는 얌전하고 조용한 사람임에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나의 시선에서 아내를 관찰하는 일은 재밌다. 팔불출스러운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나와 다른 생명체가 같은 공간 안에서 다른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도 신기하다. 

 아내에게 '뽈뽈뽈'이라는 표현을 자주 붙인다. 그 얌전한 사람이 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기면 야무지게 뽈뽈뽈 움직이기 때문이다. 


2.

 어느 날 아내는 퇴근하면서 봉투 하나를 가져왔다. 봉투에는 작고 귀여운 매화 화분이 들어 있었다. 아내의 표정은 마치 강아지라도 데리고 온 듯 상기되어 있었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아내는 항상 이동 경로가 길고 들러야 하는 위치가 많다. 또 아내는 밖에서 오랜 시간 걷거나 땀이 나는 걸 경계하고, 무겁게 돌아다니는 걸 싫어한다.(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날 아내의 경로는 이 매화를 사기 위해 서울 한쪽 끄트머리로 향했고, 매화를 들고 첫 번째 수업과 두 번째 수업 장소로 향하며 서울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서울을 지하철과 도보로 횡단한 후 다시 서울 아래쪽 끄트머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내가 이동하는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매화를 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고 사람들에 부딪히지 않으려 '뽈뽈뽈' 이동하며, 수업들까지 마치고 귀가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 아내는 얼른 이 매화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원하는 자리에 놓고 물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3.

 다음 날부터 아내는 눈을 뜨면 꼼지락거리기보다 후다닥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분무기를 들었다. 베란다에 소중히 둔 매화에 물을 뿌려줌으로써 아내의 하루가 시작됐다. 사랑이 너무 과했던 탓일까. 매화는 언제부턴가 회색빛으로 변했다. 매화가 생기를 잃어가면서 아내는 울상이 됐다. 


 어느 날 아내가 없는 집을 정리하다가 부엌 창가에 매화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아내는 결코 매화가 죽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열심히 검색하며 매화를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부엌 창문 앞은 햇빛의 양이 과하거나 적지도 않으면서 통풍까지 잘 되는 위치였다. 매화의 자리가 부엌 창문 앞이 되면서 이 창문 또한 계속 열어두게 됐다. 


4.

 아내는 여전히 매화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돌보고 있다. 화분의 이끼도 빼주고 물 양도 세심히 조절한다. 하루 살아난 것 같다가도 또 다음날이면 시드는 것 같은 모양이다. 입술을 빼쭉 내밀고 안타까워하는 아내를 보면 우스우면서도 함께 안타까워하게 된다. 

 색이 바랜 매화를 싱싱하게 다시 살릴 방법은 없을까. 이왕 아내를 관찰하는 거라면 처음 매화를 가져왔을 때의 설레는 표정을 보는 게 더 좋다. 누군가 방법을 안다면 귀띔해 주길. 아내는 그 방법을 행동으로 또다시 뽈뽈뽈 옮길 테니.

작가의 이전글 지리학자와 지질학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