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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Jul 07. 2017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시작을 만나다

시즈오카 이즈반도에 위치한 료칸, 유모토칸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마침내 아마기 고개에 다가왔구나 싶었을 무렵,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며 매서운 속도로 빗발이 산기슭으로부터 나를 뒤쫓아왔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즈의 무희’의 시작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소설 '설국'의 첫 문단은 아름다운 시작으로 자주 손꼽히곤 한다. 나는 그의 초기 작품인 ‘이즈의 무희’마저 이렇게 아름다운 표현으로 시작할 줄 몰랐다. 처음부터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었던, 이런 감성을 가지고 살아간 그가 부러웠고 샘이 났다. 그리고 이 작품의 시작이 '설국'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떤 풍경을 보면 이러한 문장을 낳을 수 있을까.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장을 따라 일본 시즈오카 이즈반도로 향했다. 시즈오카 공항에서 내려 예약해 둔 료칸 유모토칸 湯本館 까지 가려면 차로 두 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그러나 나의 안일한 여행 준비로 인하여 우리의 여행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공항에 빌릴 수 있는 렌터카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내일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단다. 가장 가보고 싶은 숙소였던 만큼 첫날에 예약해버린 나의 성급함과 게으름을 탓하며 렌터카 회사 창구에 앉아있던 아저씨에게 사정을 했다. 아저씨는 나의 끈질김에 심상치 않은 웃음을 짓더니 두 시간 정도 기다리면 한 대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료칸에 전화를 걸어 저녁식사는 포기하겠다고 전했다. 료칸 주인은 곤란해하면서 일단 출발할 때 연락을 달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저녁 6시를 훌쩍 넘겨 출발하며 다시 전화를 걸어 “정말 저녁은 괜찮다”라고 했지만, 주인이 포기가 안되는지, “누마즈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를 달라, 그때 다시 상의해보자”라고 했다. 누마즈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땐, “거기서부터는 40분 정도이니 오자마자 저녁식사를 30분 내에 마칠 수 있겠냐”라고 물었다. 료칸 주인의 끈기 있는 기다림 덕분에 우리는 가이세키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왜 여러 차례 전화를 걸라고 했는지, 료칸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고 보니 깨달았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시골마을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짧게나마 료칸 설명을 들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선생님을 아시나요?
- 네. 좋아합니다.
- 이 마루 위에서 무희가 춤을 추는 모습을 선생이 바로 이 계단에 앉아서 바라본 것입니다.



‘이즈의 무희’에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었던 나도, 소설을 읽기 전이었던 남편도 동시에 “와!”하고 감탄했다. 평범해 보이던 계단과 마루가 특별하게 변한 순간이었다. 벽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계단에 앉아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는 그의 실제 경험을 바탕을 쓰였다. 19살의 고등학생 가와바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이즈반도로 여행을 떠났다. 1918년 10월 30일부터 11월 7일까지 8일간의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을 소설로 썼다. 유모토칸은 어딘지 모르게 지난겨울에 다녀온 설국의 배경, ‘다카한(高半)’과도 닮아있었다. 료칸의 주인들이 작가의 흔적을 소중하게 남겨두고 있기 때문일 수 있고, 가와바타의 취향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취향에 흠뻑 빠졌다. 번잡스럽지 않고 조용한 마을에 위치한 아늑한 료칸. 관광객의 발길이 오래전에 끊긴 듯했고, 그날은 금요일 밤이었음에도 다른 숙박객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늦은 밤 온천욕을 하고 이층 가와바타 야스나리 방에 올라가 보았다. 우리가 머문 방보다는 훨씬 작은 방이었는데, 무려 10년 동안이나 그의 방으로 쓰였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이즈반도를 여행한 후 1927년까지 거의 매년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무희들의 사진과, 관련 자료를 보니 흐릿했던 소설 내용이 다시 생생해지기 시작했다. 옆 방에는 자료관이 있었지만 가와바타의 자료관이 아닌 이곳을 머문 다른 작가들의 글이나 그림이 걸려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벽에 걸린 수국 그림이 근사해서 사진을 찍어두었다. 


센스 있게도 방 안에 ‘이즈의 무희’ 문고본이 놓여 있었다. 가물가물한 소설 내용을 완벽히 떠올릴 수 있도록. 이미 한국어로 읽은 후여서 원작이지만 읽을만했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이즈 여행 중 유랑 가무단을 만나고, 일행 중 춤을 추는 소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가무단의 남자가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나누다 동행이 되기로 한다. 많은 마을에서 묵게 된 밤. '나'는 머물고 있는 방까지 들려오는 술자리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무희가 더럽혀지지 않을까 괴로워한다. 





나는 유모토칸에서 아침을 먹고 노천온천탕에 나가보았다. 굉장히 공개된 공간이었다. 바로 앞에 하천이 흐르고 있어 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가 올만한 곳은 아니겠지만 가림막도 없어 노천온천은 포기하기로 했다. 소설에는 벌거벗은 무희가 온천을 하다가 주인공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장면이 있다. 이 온천탕을 보니 소설의 그 부분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그들 일행을 두 번 보았다. 처음에는 유가시마 온천으로 가는 도중에 슈젠지로 가는 그녀들과 유가와 다리 부근에서 만났다. 그때는 젊은 여자가 세 사람이었는데 무희는 북을 들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여정이 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유가시마에서 이틀째 밤을 보낼 때 그들은 가무단을 부를 사람이 있나 여관에 들렀다. 나는 무희가 현관마루에서 춤추는 것을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중턱에 앉아서 열심히 보고 있었다. 처음 본 게 슈젠지였고 오늘 밤 유가시마로 왔으면 내일은 아마기 고개를 남쪽으로 넘어 유가노 온천으로 가겠지. 아마기 고개 칠십 리 길에서 틀림없이 따라잡을 수 있을걸. 나는 이런 공상을 하며 길을 서둘렀는데 비를 피하려고 찻집에 들렀다가 딱 만나 버렸기 때문에 당황했던 것이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즈의 무희’ 중에서



유모토칸이 있는 유가시마에서 무희를 마음에 둔 주인공은 아마기 고개를 넘어 유가노로 향할 것으로 예상되는 무희 일행을 따라잡으려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한다. 나도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여행을 시작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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