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증명하는 곳입니다
"안녕하세요! XX치킨을 이 동네에 새로 창업한 사장, OOO입니다. 아직 치킨에 대해 잘 모르지만 고객님들과 소통하며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결식아동, 독거노인의 끼니도 챙기며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겠습니다. 많이 사랑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홍보하는 치킨집, 주문할 맛이 나시나요? 손님은 당장 자기한테 맛있는 치킨을 줄 가게를 원하지, 사장이 치킨을 배우든 말든 관심이 없습니다. 게다가 손님한테 치킨을 배우겠다고 하면 기겁할 노릇이지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지원하는 번역사를 여럿 봤습니다. 번역 경력이나 사회 경험이 있는 사람도 포함해서요.
회사가 채용을 한다는 건 일이 많아서 힘들어 죽겠다는 뜻입니다. 회사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한의 일을 시키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원 충원을 원하는 팀은 밀리는 업무, 야근 현황 등 온갖 근거를 들어서 채용하자고 회사를 설득합니다. 그러므로 채용 후 업무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인재를 원하겠죠.
채용을 허락받으면 그때부터 일이 늘어납니다. 지원자가 볼 수 있게 직무소개(Job description)도 적어야 하고, 샘플 테스트도 만들어야 하고, 인터뷰 질문지도 작성해야 합니다. 샘플 테스트에 탈락한 사람이 또 지원해서 문제를 한 번 더 만든 적도 있습니다. 이럴 거면 그 재지원자를 그냥 서류 전형에서 떨굴걸. 적다 보니 후회가 되네요.
그러니까 '열심히 배우겠다'라는 지원자는 회사와 결이 안 맞는 겁니다. 물론 아무리 경력자라도 입사하면 새로운 분야와 문화를 배우는 적응 기간이 필요하죠. 하지만 기본적인 업무 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면서 '여기서 배우겠다'라는 식의 마인드를 갖고 지원하면 백전백패입니다.
번역 에이전시에서는 근무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쪽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에이전시는 프리랜서 풀을 최대한 확보하고 일을 뿌리기 때문에 업무 부담을 줄여야겠다는 절박함이 덜하지 않을는지요. 하지만 진정 쓸만한 번역사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으니 에이전시의 채용 과정이 만만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가끔은 "꼭 번역 일이 아니더라도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대로 회사의 관심사는 채용 공고에서 명시한 업무의 부담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일에 날고 기어도 회사가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업무 부담을 줄여주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예시로 든 치킨집 사장의 홍보 글을 보세요. 치킨집이 지역 사회에 기여하든 말든 손님이랑 무슨 상관이랍니까? 치킨은 잘 모르지만 선한 영향력을 전파할 테니 많이 사랑해 달라? 침이나 안 뱉으면 다행입니다. 회사가 필요할 때 언제나 빼 먹을 수 있는 곶감 같은 인간이 되겠다는 마인드로 지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