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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따가 Oct 09. 2021

결혼식 당일, 전지적 신랑 시점

결혼식날 신랑이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

결혼식 당일. 전지적 신랑 시점

인생은 모두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매일매일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
 - 영화 <어바웃 타임>



결혼식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이 결혼식이라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는 없었을까. 매일을 만끽하라는 어바웃 타임의 명대사가 이제야 떠오른다. 나의 결혼식날 아침은 영화처럼 감상적이지 않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났지만 시간이 없다.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메이크업 샵까지는 30분쯤 걸리니 곧 출발해야 했다.  동영상 촬영도 하기로 했으니 전날 찾아두었던 고프로를 따로 챙기고, 배터리가 부족할 것 같으니 미리 충전해두었던 보조 배터리도 작은 가방에 넣는다. 결혼반지를 잊으면 큰일이니 여러 번 확인한다. 옷 갈아입기 편하도록 단추 있는 옷을 찾아 입고 집을 나선다.


헤어와 메이크업은 압구정에 있는 샵에서 받았다. 앞으로 이렇게 연예인이나 올 것 같은 곳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날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남자들의 메이크업은 금방이라 2시간도 넘게 기다리기만 해야 했는데, 그동안 앞에 앉아 계시던 장인어른께 '나 때는 이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결혼 전날 동네 이발소에 가서 단정하게 이발하고 왔었는데 요즘 결혼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 어렸을 때는 동네잔치처럼 가마 타고 와서 결혼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고. 장인어른의 첫날밤 이야기도 조금 들었는데. 이건 잊는 게 나을 것 같다. 장인어른도 딸을 처음 시집보내시다 보니 감회가 새로우셨을 터다.


10시 30분쯤 식장에 도착해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작은 레스토랑이라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스태프 룸이 하나뿐이었는데, 난 조급한 마음에 화장실에서 급히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이게 실전이구나 싶었다. 이때부터 결혼식 끝날 때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친구들이 미리 와서 식장 세팅을 도와주었지만 친구들이 준비해 온 것들을 한 번씩 확인을 해주어야 했고, 결혼식장 직원들과 식순 세부 절차에 대해 조율이 필요했다. 미리 와주신 사진작가님은 하객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사진을 많이 찍어두고 싶어 서두르시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내 넥타이는 비뚤어져 있어 고쳐 매는데 애를 먹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긴장이 되기보다는 챙겨야 할 일이 많아 정신이 없었고, 내 등짝은 땀으로 젖어왔다. 하객들이 도착하기 전에 리허설을 간단히 했다. 반지는 손으로 가리지 않고 검지와 엄지로만 끼워야 사진이 잘 나온다고 했다. 신랑, 신부의 동선을 확인했고 사회자 분과 시상식 때 멘트를 맞춰보았다. 30분쯤 남았을 시간부터 쉴 틈도 없이 하객들이 들이닥쳤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었지만 제대로 맞아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다. 


결혼식 시작 시간인 12시가 되고 어머님들의 화촉 점화와 함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다음 순서는 신랑 신부 입장이었다. 우리는 동시 입장을 했다. 며칠을 고민해서 고른 트와일라잇 ost 'A Thousand Years'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왼발이 앞으로 나갈 때 왼팔이 같이 앞으로 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나중에 친구들 하는 말을 들어보니 로봇 같고 너무 긴장했단다. 난 해야 할 것만 정해진 대로 했을 뿐인데 자연스럽다는 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금 다시 해도 더 잘할 자신은 없다. 


반지는 왼손에 끼워야 한다



단상 앞에 도착해서 예물 교환을 했다. 리허설 때 연습한 대로 검지와 엄지로 신부 손에 반지를 끼워주는데, 끼우고 보니 오른손이었다. 내민 손을 덥석 잡아 반지를 끼워버린 나도 문제지만. 오른손을 내밀어버린 신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중에 물어보니 밥 먹는 손이라 먼저 앞으로 나와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눈치챈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오른손에 반지를 낀 채로 식을 이어갔다.


예물 교환이 끝나고 아버지들의 덕담이 이어졌다. 장인어른은 미리 덕담 내용을 안 알려주셔서, 준비가 덜 되었을까 걱정했는데. 작가를 하셔도 좋을 정도로 정성을 들여 준비해오셨다. '어릴 적 언니와 싸우지 않겠다는 반성문 조차도 귀엽고, 너의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라는 대목에서 딸을 향한 사랑이 느껴졌고. '안마 쿠폰 5개, 심부름 쿠폰 5개, 청소 쿠폰 5개. 잘 갖고 있다. 언제든지 사용해도 되지?'라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사랑과 유머가 함께한 감동적인 덕담이었다. 


다음으로 엄마의 축가가 이어졌다.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를 부르셨는데 박자는 조금 안 맞았지만, 일부러 엇박으로 부르는 것 같이 느껴져 오히려 좋았다. 나에겐 박자를 못 맞추는 것 정도는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잘 부른 노래였다. 눈물 많은 엄마가 울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었지만, 예상과 다르게 노래가 끝날 때까지 울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 눈가가 촉촉해져 애먹었다. 


결혼식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부모님도 주인공이니 함께 해주셨으면 했다. 우리의 바람대로 부모님들이 함께 무대로 올라와주셔서 어떤 결혼식보다도 감동적인 결혼식이 될 수 있었다. 부모님의 덕담과 축가에 눈물 많은 친구들은 눈물을 쏙 뺐다고 한다. 부모님 카드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장기하의 '느리게 걷자'에 맞추어 퇴장을 했다.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우리는 노래 가사에 맞춰 정말로 느리게 걸었다. 누군가에게 결혼식은 쉽고 빠르게 해치워버릴 수 있는 일일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결혼식은 하나하나 준비해야 했기에 때로는 골치 아프고 때로는 지겹기도 한 일이었지만 다시 하라고 해도 직접 준비할 거다. 식장, 드레스, 사진, 반지, 영상, 청첩장... 돈 많이 주고 패키지로 골랐으면 시간도 많이 아끼고 몸도 편했겠지만 섭섭한 결혼식이 되었겠지. '너무 빨리 가다가는 지나가는 고양이도 못 보고' 지나쳐버린다. 결혼 생활도 결혼식처럼 느리게 걷겠다. 살아가며 고양이 구경만큼 중요한 게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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