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에서 마흔아홉까지
2004년 서른다섯의 나는 미디어에 알려진 청년이 되었다. 연합뉴스의 내 기사는 나흘 이상 첫 화면에 걸려 있었다. 검색어 1위에 이름이 올라갔고, 방송사와 신문 잡지들의 인터뷰 요청으로 전화기에 불이 났다. 세상의 스폿라이트를 받는 자리에 대한 두려운 기분에 휩싸였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책임지고 간호한 일이 뭐 그리 큰일이라고 특종 잡듯이 달려드는지 경황이 없었다. 식물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청춘의 낭만과 여유를 접고 식사와 수면도 포기하고 몰두해 온 근원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얘기는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집에서 간호하며 보낸 8년의 청춘은 내겐 잔잔한 물결이었지만, 사람들은 큰 파도로 받아들였다.
나는 조용히 어머니를 돌봐드리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고, ‘그저 사랑하며 사는’ 메시지는 삶으로만 이어가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생방송 하나 정도 하고 사양하겠다고 생각한 날, KBS <아침마당>의 출연 요청에 응했다. 25분 정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어 떨리기보다는 기대가 되었다. 스튜디오에서 긴장하지 않도록 편안하게 진행해 주신 이금희 아나운서가 방송 초반에 한 질문이 있다. 어머님이 쓰러지시기 보름 전에 우리 가족이 처음 찍은 가족사진을 보며 “저 사진 보며 매일 많이 울었겠어요”라고. 나는 이 땅에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마주하지 못할지라도 천국에서 더욱 환한 미소로 함께할 어머니를 소망할 수 있는 가족사진을 보름 전에 남긴 것이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그 이른 아침에 방청객들이 많이 우셨고, 나는 유쾌한 일들을 떠올려가며 즐겁게 25분을 채웠다. 손범수 아나운서는 자신도 크리스천이라며 오늘 방송 잘해 주었다고 악수했고, 이금희 아나운서는 방송 작가 통해 내 계좌를 알아내 후원금을 보내주시고, 감사 메일에 일일이 답장해 주며 따뜻한 인연을 선물하셨다.
2004년 여름을 기점으로 내 인생은 슬로우슬로우에서 퀵퀵으로 바뀌었다. 조용하기만 한 병간호의 삶이 책과 방송으로 소개되었고, 중견기업 홍보팀에 특채되었고, 어머니 간호를 돕겠다는 연인을 만나 결혼했고, 두 아들의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작년 가을 어머니께서 편찮으신 세월 20년을 마치고 소천하시며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아왔는지 알려주셨다. 지금 나는 괴롭고 약한 분들을 돕는 사회적기업을 시작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도우심은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기도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많이 아픈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를 어려워한다. 모든 것을 잃었던 그 괴로운 과거를 회상하며 감사한 마음만 남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터치 때문이다. 그 터치는 내 힘만으로는 견딜 수 없던 시간이었음을 인정하고 주 되심을 깊이 새길 때 느낄 수 있다. 설렘과 기대의 미래를 얻기 위해서는 아팠던 날을 다시 기술할 필요가 있다. 나의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광야의 나침반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고통 중인 사람에게 다가섬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중년 가장에게 다가오는 낯선 광야가 불안이 아닌 기대와 설렘으로 채워지는 건 삶의 소망이 공동체에 있을 때다. 약자들을 가장 많이 생각하신 예수님의 생애가 있고, 내가 약할 때 다가온 많은 사랑이 있다. 아픔과 아픔이 서로 어우러져서 보듬는 공동체만이 우리의 시선을 땅의 문제에서 하늘의 소망으로 바꿀 것이다.
2018.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