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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May 05. 2021

영혼의 어두운 밤

벼랑 끝에서 더 잘 보이는 것들

내가 요즘 괴로워하는 증상에는 잠을 너무 많이 자는 습관이 있다. 삶에 낙이 없고 무거운 숙제와 책임감만 보이다 보니, 게다가 믿었던 이에게 배신감을 심하게 겪고 나니 계속 잠이 쏟아진다. 잠을 통해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선택한 건지도 모르지만, 요즘 괴로울 정도로 잠을 많이 자고 있다.


어제는 저녁 8시쯤 잠든 것 같다. 허리가 무거워 잠깐 눕고 싶었을 뿐인데 눈 떠 보니 새벽 4시다. 대략 8시간을 잤고, 나쁜 꿈을 꾸었고, 간만에 새벽에 눈이 떠졌다. 계속 잘까 하다가 더는 혐오스러운 자신을 두고 볼 수 없어 일어나 아이들이 남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는 책상에 앉았다. 매일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EBS Easy English의 어제 날짜 학습분을 복습하고, 줄쳐 가며 읽고 있는 <우울증 벗어나기>의 마지막 챕터를 읽었다. 정신이 맑아졌다. 역시 새벽이 주는 위로가 있다.



<우울증 벗어나기>(안셀름 그륀 저)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74237&tab=introduction&DA=LB2&q=%EC%9A%B0%EC%9A%B8%EC%A6%9D%20%EB%B2%97%EC%96%B4%EB%82%98%EA%B8%B0



안셀름 그륀은 책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자신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시고, 청하기만 하면 곧바로 우울증을 치유해 주신다는 환상을 품는다. 우울증은 무력함을 직면하게 한다. 우리는 더 잘난 사람이 되고, 내적으로 안정되고, 모든 일을 지배하는 데 더 이상 하느님을 이용하지 못한다. 무력함을 느낄 때만 하느님에게 헌신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책의 이 대목에서 위로를 받았다.


일전에 비슷한 또래의 벗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좋은 양식을 주시지, 독을 주시겠어요?" 하는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내가 대화를 통해 이성적 답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으로 넘어갔다. 기도를 만능치트키로 생각하는 신앙인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특별한 방법으로 그분을 체험하는 기회로서 어둠이 존재한다. 긍정의 태도를 강조하는 미국식 자기계발 처방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인생은 과거와 현재를 뒤집고 밝은 미래로 향하게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래를 등지고 두려움 속에 노를 저어 목적지를 잘 모른 채 나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적당한 거리의 무관심으로 서로 충돌을 피하는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를 비판해 왔지만, 나이 먹어 가면서는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된다. 어느 정도 내면을 감추고 견디고, 밝은 메이크업으로 집밖을 나가고 다시 감추고 견디며 사는 게 현실이고 이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덕질하는 대상을 얘기하는 것이 내면의 속살을 얘기하는 것보다 효과가 더 좋다.


위계에 의한 심리 조종과 장악인 '그루밍'에서 요즘은 '가스라이팅'을 흔히 쓴다. 나무위키에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자주성(自主性)을 교묘히 무너뜨리는 언행의 일부적 총체로 피행위자가 행위자 자신에게만 의존하게 만들려는 내재적 요인에 기인한다. 당한 사람 입장에서 자기 의심이 커지거나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지는 등 정신적인 조종을 당하므로 정신적 학대로 분류하기도 한다"고 설명돼 있다. 작년부터 흔히 쓰인 이 용어를 들으면서 나는 한국 교회가 떠올랐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위선, 바울은 선민의식에 대해 많은 말씀을 남기셨지만, 한국 교회는 이 두 가지에 찌들어 있다. 그 근원에는 가르치는 자들의 가스라이팅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도의 생활 패턴을 자신의 생각으로 장악해서, 다른 이야기와 낯선 이야기는 잘못된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경청과 공감보다는 지적과 장악이 흔하다.


삶의 고립감을 느낄 때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 내면의 공허를 단지 영적 노력이 없기 때문에 혹은 온갖 명예욕, 공명심, 자만, 탐욕 등이 원인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아무 말도 나눌 수가 없다.


침묵의 선택을 하면, 아무도 내 진심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우울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억지로라도 매일 큐티를 하고 있다. 잠언서를 묵상하면서 여호와를 알게 되는 것이 내 영혼을 즐겁게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원천이 은혜로운 말씀임을 보게 되었다(행 20:32). 하루를 견디다가 마음이 금세 무너질 수 있어도 참고 억압하기보다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것이 낫다. 억압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더 컴컴한 어둠에 들어가 희미한 빛마저 잃을 수 있다.


지난 주에 30년 지기를 만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친구는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다.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마치 묻지 마 폭력을 당한 기분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분노와 자기부인 사이에서 심히 괴로워 카톡과 페북에서 그를 끊어내 버리는 것으로 최소한의 화를 표현했다. 그만큼 자존감이 더 무너졌고 배신감을 느꼈지만, 최종에는 왜 쓸데없이 괴로운 마음을 털어놔 이런 사달을 일으켰을까, 하는 자책감에 빠졌다. 다시는 그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런 결심의 나를 들여다보기라도 한듯, 아는 선배님이 전화를 걸어주셔서 서로 비슷한 경험을 나누고는 한결 나아졌다. 이어서 멀리 동탄의 우리집까지 출판계 지인 두 분이 찾아주어 함께 음식을 들고 호수공원을 산책하며 두런두런 이슈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좀 부드러워졌다.




안셀름 그륀은 "울어라, 눈물은 죽은 영혼도 살린다"라고 했다.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이해해라. 이해하는 마음은 위축된 마음을 살린다"라고.

오늘 같은 휴일이  걱정스럽다. 아이와 무엇을 해야 할까.  표정을 감추는 연기를 해야 한다. 가장이기에 책임을 다하고 나를 버려야 한다. 우는  대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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