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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Jun 10. 2018

어머니 빈소에서 만난 부활

20년 병간호 후에 재해석한 고통의 의미



“신영애 환자 보호자님, 지금 빨리 오셔야겠어요.”

새벽 3시 반에 울린 병원 전화였다. 직감적으로 지금 어머님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얼른 일어나 병원으로 달려갔다. 4개월 전부터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고 자던 중이었다. 그 4개월은 내게 극심한 우울과 고통을 안겨 주었고, 삶의 의지를 다 떨어트렸다. 도대체 20년의 긴 세월 이어진 사랑하는 생명의 소멸과 지난 4개월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 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새벽, 내가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신 어머니의 육신을 마주했다. 피부가 상하고 연약하게 말라비틀어진 그 육신의 흔적 앞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장례식장 앰뷸런스가 오기까지 2시간 넘게 어머니의 육신과 대화를 나눴다. “수고 많으셨어요. 사랑해요.” 이 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영혼의 대화는 고요한 중에 비언어적 요소로 계속됐다. 생명이 다한 어머니의 몸에 마지막까지 감도는 따뜻한 온기는 목 뒷부분에 남아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뒷목에 손을 대고 기도했다. 곧 앰뷸런스 차가 오고 어머니의 몸이 실리자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1997년 11월 27일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셔서 병원에서 7개월, 집에서 7년, 다시 병원에서 13년 어머니는 만 20년을 식물 상태로 계시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엄마의 어머니가 되었다

나는 건축을 전공하고 광장시장에서 새벽 장사로 밤낮이 바뀌어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러브하우스를 지어 드리고 편안하게 누리는 인생을 맞이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김영삼 정부 말기였던 그 시절,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셔서 가게 문을 연 뒤 갑자기 의식을 잃으셨다. 그 새벽에 큰 병원 두 곳에서 수술이 거절되고, 골든타임을 놓친 채 간신히 수술실로 들어가셨다. 3시간 넘게 집도한 의사 선생님은 기다려 봐야 결과를 안다고 하셨다. 중환자실에서의 석 달 후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했다. 중환자인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왔고 나는 진학해 둔 대학원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영양사가 되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진짜 사랑할 시간을 얻은 것이다. 헤세드의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드러내신 그 책임지는 사랑으로 청춘의 시간을 채웠다. 욕창과 폐렴이 사망 원인인 식물 상태의 어머니 몸은 내가 연구한 간호 방법으로 매일 향긋하고 튼실한 피부로 지내셨다. 나는 24시간 어머니께만 주목하며 손과 발, 호흡을 대신해 드렸다. 어머니는 나와 눈빛과 표정이 교감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표정만 보고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옹알이를 엄마는 알아듣듯이 나는 어머니가 되었고 엄마는 갓 태어난 아픈 딸이 되었다.

 


 
내 인생에 특별 은총인 부분을 다 채워 주셨다.

집에서 간호할 수 없게 된 2004년부터는 장기 재활 병원의 중환자실에 모시고 간호했다. 병원에서 할 수 없는, 그리고 하지 못하는 간병을 매일 드나들며 보충해 드렸다. 서른다섯에 나는 어머니를 간호한 이야기를 출간해 에세이 작가가 되었고, 취직도 했다. 더불어 어머니 간호를 돕겠다며 다가온 자매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어머니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조금씩 나빠지셨지만, 내 인생에 특별 은총인 부분을 다 채워 주셨다. 병이 낫지 않지만, 병을 돌볼 수 있는 힘과 의지를 말씀과 공동체에서 얻었다. 그 사이 대통령이 다섯 번 바뀌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더하면 더해졌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 고통의 세월에 나는 마음 아프고 인생을 계획할 수 없었고, 이 땅의 삶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답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정이 신앙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 그 깊은 고난의 세월은 죽음을 가까이에서 묵상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욕창과 폐렴은 걸리지 않으셨다. 그런데 간호 18년이 되자 장 기능이 멈추었다. 피부가 말라갔고, 경관식 죽을 강제로 소화시키는 약을 투여해야 했다. 이런 연명 치료를 잘 돕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일까? 어려운 문제였다. 의료진과 상의해 독한 약들의 투입을 멈추기로 했다. 숨 쉬는 시간에 지옥이 있다면 딱 그 순간일 게다. 그 마지막 고통의 시간이 4개월이나 이어졌다. 극도의 긴장 상태로 있다가 어머니의 마지막 새벽을 만난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자리에서 '부활'을 묵상하다.

장례식장에 제일 일찍 도착한 작은 화환에는 '부활'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 영정사진과 가까운 곳에 두고 손님들을 맞이하며 나는 그 '부활'의 의미를 묵상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자리에서 묵상하는 부활만큼 강력한 전달은 없다. 어머니는 어떻게 보내드려도 한이 남는다. 그런데 그 한이 부활의 의미 앞에서 말끔히 사라져 갔다. 내게 그 순간의 부활은 세상 무엇도 줄 수 없는 위로였고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어머니의 천국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보배로운 선물로 다가왔다.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경험했기에 천국의 예배가 가능했고, 장례식은 부활을 소망하는 가장 영적인 예배였다. 어머니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애써온 무수한 아픈 사건과 시간들은 결국 부활을 깨달으며 유익으로 변모했다. 천국이 내 삶의 현장에 가득해지는 건 부활 때문이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대한 배움도 부활을 통해서 완성된다. 부활과 천국의 메시지가 없다면 고통 가득한 인생에 참 자유가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면서 나는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즐겁게 만날 곳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살게 하신 이 땅에서 무엇을 좇아 살 것인지에 대한 답을 알려 준다. 헤세드의 그 사랑, 부활, 천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
201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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