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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오라기 Nov 06. 2020

팬더와 대나무

채식주의자들이 팬더를 부러워하는 이유

요즘 뜨는 키워드 중 하나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말 그대로 일상 생활에서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환경 운동의 한 방식이다. 음식을 포장할 때 집에 있는 반찬용기를 활용한다든지, 세제나 샴푸통을 잘 씻은 뒤 건조시켜 재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가 ‘비건(Vegan)’이다. 비건은 채식의 일종인데, 고기와 계란, 우유 등 모든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가장 엄격한 채식 방법이다. 최근의 비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육식을 넘어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지 않은 생필품을 구매하거나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회사의 화장품을 사용하는 등 생활 방식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기후 변화에 위기감을 느낀 인간이 이토록 열심히 환경 운동을 펼치고 있긴 하나, 사실 자발적 채식주의의 선도 주자는 팬더다.


팬더는 육식동물인데도 채식을 한다. 채식을 한다기보다는 대나무만을 왕창 먹는 것을 좋아한다. 대나무 하나만 먹어서 종족이 멸종될 지경에 이르러도 대나무를 열심히 먹는다. 초식동물은 섬유질이 많은 풀을 잘 소화시키기 위해 4개의 위장을 갖고 있다. 팬더는 육식동물과 같은 내장 기관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나무만 먹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팬더의 DNA에 고기맛을 느끼는 유전자가 사라졌다고 한다. 또 다른 육식동물과 다르게 대나무를 소화할 수 있는 효소 비슷한 것도 갖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초식동물에 비해서는 소화력이 부족하다. 덕분에 팬더는 대나무를 천천히 씹어서 소화시키는 것을 하루 일과로 삼고 있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팬더는 그저 '대나무가 좋아서' 채식주의자가 됐다. 그래서 배앓이를 하면서도 열심히 대나무를 먹는다.


한편으로 팬더가 조금 부럽다. 조금 괴팍한 편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습성이, 귀여운 외모로 인해 색다른 특징이 됐다. 누구도 대나무를 편식한다는 이유로 팬더를 질책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오히려 자발적으로 나서 팬더의 생태계를 보살펴 주고 번식을 돕는다.


반면 나의 식습관에는 주변의 참견이 많다. 어렸을 때는 야채를 골고루 먹으라고 하더니, 요즘 TV에서는 한우와 한돈의 소비가 적다면서 공익광고까지 한다. 한쪽에서는 '지나친 육식'을, 다른 쪽에서는 '지나친 채식'을 경계한다. 인터넷의 어딘가에서는 커피가 몸에 안 좋다고 했다가, 또 다른 데서는 혈관 질환에 도움이 된다고 권장한다. 패스트푸드 위주의 식습관은 안 좋다고 하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한식은 너무 짜고 자극적이니 몸에 나쁘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참견도 참견이지만, 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만한 여력이 내게는 없다. 하루종일 일에 시달리면서 미지근한 물 2L를 벌컥벌컥 들이키기도 어렵고, 팍팍한 지갑 사정에 유기농 야채보다 편의점 샌드위치가 반가운 것이 현실이다. 짜고 달지 않은 건강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시간과 공간이 없는 것도 물론이다. 채식에 도전해 보고 싶지만, 삼겹살 회식에 나 혼자 빠지기도 뭐해 켕기는 마음으로 퇴근 후 회사 동료들의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환경을 위한 노력들을 실천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대단한 일이다. 동시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에 대해 죄책감도 느꼈다. 말로만 동물을 좋아한다고 할뿐, 정작 동물을 위한 변화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 같은 죄의식이 들었다.


딱히 지구를 위해 채식을 하는 것도 아닌 팬더는 귀여움을 받는데, 우리 주변의 채식주의자들은 유독 유쾌하지 못한 일들에 시달리곤 한다. '유난 떤다'는 비웃음은 익숙할 지경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럼 고기를 먹는 내가 나쁘다는 거냐'며 벌컥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단다. '맛있는 비건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을 찾기란 로또 2등만큼 어렵다. 여력이 부족한 개인들이 사회적 의무감과 윤리적 책임감까지 떠맡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 패트병을 하루에도 몇십만 개나 찍어내서 야생동물이 먹고 농업에 쓰일 수 있는 지하수까지 퍼다 파는 생수 업체들, 살아 있는 동물의 털을 뽑아 롱패딩을 잔뜩 만들고 다 팔지 못해 재고 처리에 어려움을 겪는 회사들,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학대에 가까운 동물 실험을 계속하는 기업들도 나보다 훨씬 더 적은 죄책감을 안고도 잘만 지내고 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천도 중요하겠지만, 때로는 몸집이 큰 기업이나 정부가 나서서 작은 것 하나라도 바꿔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든다.


다행히 최근에는 분해가 가능한 포장 용기가 사용되거나 음식점에서 채식 메뉴가 개발되는 등 조금이나마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사실 이런 일들이 내게는 팬더를 열심히 키우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여겨지는데, 아직 큰 관심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게 사람들이 팬더보다 덜 귀여워서 그런거라면 조금 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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