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것이 좋아
새를 무서워한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따지자면 나는 물고기를 무서워하는 편이다. 물고기가 무섭다기보다는 물 속에서 뭔가가 헤엄치고 있다는 이야기 자체가 무섭다. 새가 무섭다는 분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발톱이 무섭다든가, 발가락의 주름이 징그럽다든가,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이 싫다든가, 특히 나를 향해 있는데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은 미묘한 시선 때문에 눈이 싫다는 의견도 지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집계됐다.
오늘은 ‘새가 너를 더 무서워하겠다’ 라는 핀잔 대신 다른 얘기를 해 보려 한다. 혹시 주변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비둘기를 관찰해 본 적이 있는지? 눈동자 주변이 붉은데다 걸을 때마다 고개를 기울이면서 까딱이는 몸짓은 잘 보면 꽤 독특한데, 그래서 그런지 비둘기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무섭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마 그 특징적인 고갯짓을 따라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고자 한다면 꽤 많은 관절 부품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비둘기가 사람이 보기에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잘 보면 비둘기의 눈은 얼굴 앞이 아니라 옆에 달려 있다. 사람으로 치면 관자놀이에 눈이 붙은 셈이다. 몸이 정면을 향하고 있어도, 바로 앞에 있는 물건을 볼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과자 부스러기라도 찾아 먹으려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서 숙인 채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하늘을 볼 때도 머리를 옆으로 틀어서 봐야 한다.
게다가 비둘기는 안구 근육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단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눈알을 마음대로 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을 보더라도 굳이 고개를 움직이지 않는다.걸으면서 간판을 읽는 것도 어렵지 않다. 사물이 이동하더라도, 안구 근육이 이에 따라 움직이면서 초점을 맞춰 준다. 비둘기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가만히 서서 움직이는 물체를 바라보면 초점이 맞지 않는다. 때문에 끊임없이 머리를 움직여 가며 세상을 관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꽤 많은 동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알려진 사실로, 아마 전문가들도 우리처럼 비둘기의 생소한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특이하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다소 기이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비둘기의 움직임은 오히려 비둘기 자신이 부지런히 사는 증거이기도 한 셈이다.
비둘기는 지나친 동정과 비난을 함께 받는 경향이 있다. 우선 깨끗하지 못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도시에서 흔히 마주치는 비둘기는 하루 종일 미세 먼지 속을 헤엄쳐 다니며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을 열심히 먹고 도랑에 고인 물도 아무렇지 않게 마시니 그런 손가락질을 당하기 마련이다. 이와 동시에 비둘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 손에 억지로 방생돼 사람이 만든 환경 속에서 오염돼 가는 것뿐인데 혐오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너무하다는 지적이다.
사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든 비둘기가 그런 걸 신경이나 쓸까 싶다.
물론, 도시의 환경이 비둘기에게 좋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비둘기 같은 하찮은 동물을 가지고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말라는 잘난척은 더더욱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이다). 다만 어떤 건물 에어컨 실외기 밑바닥이나, 낡은 처마 어딘가에서 간신히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의 비둘기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삶이다. 더러운 공기와 빗물을 마시고 음식물 쓰레기들을 두고 경쟁하고 때로는 발이나 날개가 잘리기도 한다. 살고 싶다면 이런 잔인한 조건들을 이겨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동정의 시선을 보낸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 ‘있는 그대로’라는 게 좀 어렵긴 하다. 각자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게 과연 어떤 의미일지.
가정을 해보면 어떨까. 요즘 ‘휴거’나 ‘빌거’라는 말이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단다. 휴거는 ‘휴먼시아 거지’ 그러니까 보다 저렴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놀리는 말이고, 빌거는 아파트가 아닌 ‘빌라에 사는 거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이들의 시각에서라면 나 같은 청년 세대는 ‘전세 거지’나 ‘원룸 거지’정도가 되겠다. 은근슬쩍 ‘부모님과 같이 사느냐’와 같은 운을 띄우면서 상대방이 나보다 좋은 집에 사는지 아닌지 견줘 보는 어른들에 비해서는 솔직한 표현이긴 하지만, 가난을 두고 비난한다는 점에서 나쁜 말이긴 하다.
근데 반대편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어쩜 저렇게 가난하고 불쌍하고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그런 나쁜 말을 할 수가 있어? 인간도 아냐!’라며 눈물 콧물을 흘려대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머쓱하다. 가난은 그냥 가난 그 자체일 뿐이지 비난의 대상도 동정의 대상도 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네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건 다 사회 때문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지옥같은 환경에서 삶을 살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 나 같으면 자살했어. 뭐 이런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적선은 꾸짖음보다 불편하다.
겨울에는 따뜻함이 여름에는 차가움이 필요한 것처럼 때로는 미지근함이 반가울 때도 있다.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시각이 편협하든 공정하든 관계 없다. 결국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 또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그 전까지는 굳이 멈춰 서서 엄격한 평가를 내리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보고 지나가기만 해도 된다.
D.H. 로런스의 ‘야생동물은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참 멋지다. 시대를 막론하고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인데다 나 같은 사람도 여러 해석을 덧붙일 수 있는 문장이란 평등한 매력이 있어서 기쁘다. 2020년의 비둘기도 스스로를 동정하진 않을 것 같다. 비둘기는 그냥 비둘기대로 바라봐주면 어떨까 한다. 동시에 혹시 내가 나와 남을 비둘기 보듯 하지는 않았나 생각해 본다. 지나친 동정도 비난도 아닌 때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도 필요한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역시 이 있는 그대로라는게 어려운 문제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