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상어의 생각을 의심하자
'알고 있는 동물 이름 대기' 놀이를 한다고 치면, 상어는 개나 고양이와 함께 꽤 앞 순서에 나오지 않을까. '상어라는 동물은 듣도 보도 못했다'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거다.
근데 대중적 유명세에 비해 상어 자체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종류가 수백 가지나 되지만 상당수가 심해에 살고 있어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호랑이나 사자처럼 바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매우 흉포한 동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사실 사람을 공격한다고 알려진 것은 10여 종에 불과하다.
즉 우리는 상어에 대해 다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뭐 실제로 상어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엮일 일은 별로 없으니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최근 신경쓰이는 소식이 들린다. 올해 모든 사람들의 핑계였던 코로나19 종식을 위해 대량의 상어가 희생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상어 간에서 추출되는 '스쿠알렌'이라는 성분이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위한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상어 간에서 그런 성분을 찾아낼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궁금했는데, 이미 여러 제약사에서 독감 백신 보조제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었단다. 여튼 만약에 정말로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고 여기에 상어 간을 써야 한다면 수십만 마리의 상어를 희생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높아지는 중이다.
평소 상어와 친분은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지구에 좋은 영향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인간 입장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던 상어를 마구 죽이자니 죄책감이 든다. 상어의 희생이 코로나19의 완전 종식에 도움을 준다고 해도(의사들에 따르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변종이 워낙 다양해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한다) 선뜻 '그러면 모든 상어를 죽여버리자'고 할 만한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상어와 말을 할 수 있게 돼서, 상어들이 서로 의견을 수렴한 결과 '우리의 희생으로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죽여도 된다'는 결론을 냈다면 어떨까? 상어가 괜찮다고 했으니 그렇게 해도 될까?
과거에 비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규칙이 엄격해지고 있다. 술을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권해서는 안 되고, 사생활에 대해 너무 캐물어서는 안 되며, 상대방보다 사회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갑질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소심함 지수가 0부터 10까지 있다면 13 정도에 해당하는 나에게 이런 변화는 아주 기쁘다. 물론 규칙들이 전부 지켜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몇몇이 나서서 '그건 나쁜 행동이다'라고 가해자에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인에 대한 배려'와 '무조건적인 수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지적해 줘야 한다. 심지어 그 피해 대상이 주장을 하고 있는 당사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상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무고한 생명을 다른 생명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일방적으로 희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 나서서 ‘그건 좀 아니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써먹기 위해 우리는 법이나 윤리 같은 사회적 장치를 운영하고 있다. 개인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수가 동의할 만한 제재 방안을 작동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구분이 무시되기도 한다. 그리고 무시되는 과정에서 약한 존재들이 상처를 받기 쉽다.
예를 들면 많은 아동학대 사건들이 이렇게 일어난다. 병원과 경찰, 학교와 지자체 등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보호벽이 존재하지만 부모가 '우리 아이는 괜찮다'고 말해버리면 더 이상 개입하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 아동 보호 제도의 약점이다. 어쨌든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판단이 최우선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의식주를 무기 삼아 저항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부모들이 종종 가벼운 처벌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다. 어쨌든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일반적인'가정에서 커야 한다는 선입견 탓이다.
좀 더 넓게 보면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가해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가해자에게 학대받은 피해자가 괜찮다고 한다면 갑자기 그 견고하던 모든 사회적 구조가 '다음부터 그러지 마세요'라는 말을 남긴 채 해파리처럼 힘없이 투명해진다. CCTV로 사람들의 얼굴을 마구 들여다보던 경찰들과 어마어마한 액수의 벌금도 아무렇지 않게 선고하던 법원도 갑자기 교과서에 찍혀 있는 사진 정도의 존재감만 남기고 사라진다. ‘남의 가정사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 아니다’라는, 백 년 전쯤에나 통했을 것 같은 말이 갑자기 튀어나와 견고한 논리를 구성한다.
개인을 존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목소리 큰 사람, 힘으로 남을 짓밟고 올라서 눈에 띄는 사람들의 의견이 단지 먼저 눈에 띈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아서는 안 되겠다. 남의 행동을 옳다 그르다 운운하는 것은 불편하고 피곤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 놓은 사회적 제도를 믿고 그 안에서 개선책을 찾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상어가 '우리를 죽여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 상어가 '순수한 고대 상어의 피만을 물려받은 종류만을 남기고 멸종시켜야 한다'는 히틀러적 사고방식을 가진 상어일 수도 있지 않은가. 상어에 비유하면 쉬워 보이는 일인데, 인간 세계에서는 제대로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