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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무지 Feb 27. 2024

결벽증은 아닌데 정리병은 맞아요

청소

나는 깨끗하게 사는 편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날을 잡고 집 대청소를 하곤 했다.

친구네 집이나 이모네 집에 가면 청소를 하고 오기도 했다.


누가 시켜서 그랬냐고?

내가 더러운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몸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었다.

물론 타인의 허락 없이 그들의 물건을 건드리는 법은 없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부모님 댁에서 가족과 함께 살 때는 어지르는 사람을 쫓아가지 못해 청소하길 포기했었다.

그런데 자취를 하면서 나만의 공간을 예쁘게 꾸미고 깨끗하게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집이 참 깨끗하다고 칭찬을 했다.

이사를 여러 번 했는데, 집을 내놓을 때마다 다음 세입자에게 늘 깨끗하게 살았다는 말을 들어왔다.



내가 깨끗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여기에 있다.

나는 무언가를 쌓아두는 것을 싫어한다.

휴지처럼 반드시 벌크로 사야 하는 물품을 제외하고는 웬만해서 개별 구매를 하려고 한다.

다이소만 가봐도 1인 용품, 소량 용품이 얼마나 잘 나와있는데, 굳이 많이 사서 집에 보관할 필요가 없다.


또한 나는 맥시멈 라이프와 미니멀 라이프 둘 중 어떤 스타일이냐고 물어보면 미니멀 라이프에 속한다.

쓸데없는 물건에 소비를 잘 안 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래서 처음 자취할 때 일부러 빌트인인 곳을 찾아 들어가기도 했다.

안 그래도 좁은 원룸에 빌트인이라니...

덕분에 내 공간이 너무 좁았고 숨이 막혀 금방 나왔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중고거래를 애용한다.

내가 인테리어 용품이나 옷 등을 구매하더라도 사용 빈도수가 낮으면 물품을 판다.

또한 나는 새 제품을 좋아하지만, 물품을 잘 이용할 수 있을지 믿음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중고로 산 다음, 이용 가치가 느껴질 때 새로 구매하기도 한다.


게다가 나는 반드시 지정된 자리에 해당 물건을 놓아야 한다.

가족과 함께 살 때는 참 지켜지기 어려웠는데, 혼자 사니 물건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어서 좋다.

좁은 공간을 알차게 이용하려면 정리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가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놀고 가거나 내가 친구들 집에 가서 놀고 간다.

친구들은 먹으면서 떠들고 놀기 바쁜 반면, 나는 먹으면서 치우느라 바쁘다.

보통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배달음식을 먹어서 앞, 뒤, 옆으로 각종 음식이 놓여 있게 된다.

나는 중간에 음식이 사라져서 비워지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뒤로 빼서 테이블을 깨끗하게 한다.

빈 그릇뿐만이 아니라, 일회용품 사용으로 나온 비닐들도 싹 모아 둔다.

이때 팁은 배달음식이 담겨있던 큰 봉투 3개 정도를 플라스틱, 비닐, 일반쓰레기로 나누어 분리수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치울 때 번거롭지 않게 빠르게 치울 수 있다.


친구들은 내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치우니까 신기해하고 본인들이 안 치워도 된다고 좋아한다.

나 또한 못 참고 움직이는 내 모습이 마냥 신기하다.

그렇다고 친구들한테 '너네는 왜 안 치우냐', '같이 치우자'며 함께하길 원하지 않고 혼자 하면서 스트레스받지 않으니 서로서로 좋은 거 아니겠나.


나는 대학생 때 호텔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연회장에서도 해봤고 뷔페에서도 해봤는데, 개인적으로는 연회장이 더 재밌었다.

뷔페는 사람들이 먹을 때 빈 접시를 중간중간 빼는 게 전부라 시계만 쳐다보게 된 반면,

연회장은 사람들이 휩쓸고 간 더러워진 자리를 마주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공간을 내가 지나갈 때마다 깨끗해지는 그 순간은 나를 설레게 했다.

비유가 안 맞을 수 있지만,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변신 전후를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부모님 댁에서 대청소할 때도 꼭 치우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치우고 난 뒤에 사진을 또 찍어서 전후를 비교하는 게 내가 청소하는 낙이었다.

가족 단톡방에 '이랬었는데! 요래 됐습니다!'를 보내면서 스스로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럴까 생각해 봤는데,

내 뇌는 정리하는 행위를 게임이라고 생각하도록 시스템 되어있는 것 같다.

정리할 때마다 도파민이 분비가 되고, 쓰레기를 보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가져가고 싶은 심리작용을 멈출 수 없다.


'정리병에 걸린 사람이라면 결벽증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명확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청소기를 잘 밀지 않는다.


내가 매번 부모님 댁 청소를 할 때마다 엄마가 했던 말이 있다.

'어머 딸~ 집이 굉장히 깨끗해졌네?! 근데 바닥도 밀었나? 왜 맨날 바닥은 빼고 할까?'

그러면 나는 늘 생각했다.

'바닥은 더러운 게 잘 보이지도 않는데 왜 해??'


그렇다. 나는 바닥에 더러운 게 보여야 청소기를 민다.

내 눈에는 깨끗하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막상 청소기를 밀어보면 더러운 게 많다고 네가 모르는 거야~'라고 하지만,

'청소기는 밀어도 밀어도 계속 먼지가 나온다'고도하고

'아까 내가 청소기를 밀었나?'라고도 하는데

그냥 의미 없는 청소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청소기는 밀면 모르고 안 밀면 티가 난다는 게 딱 맞는 말 같다.


또한 나는 먼지도 자주 닦는 편은 아니다.

먼지가 쌓여서 내 눈에 보이면 닦지만, '대청소의 날'이라고 날짜를 지정해 놓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먼지가 내 눈에 보이는 순간, 그날은 '대청소의 날'이 되기는 한다.


우리가 삶을 살 때, 무언가 노력한 변화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다이어트도 열심히 했지만 체중계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나 내 몸에 살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시험지의 비 내리는 걸 멈추게 하거나 어느 점수 이상 오르지 않는 것.

취업을 했지만 통장 잔고가 늘거나 집이 떡하니 생기는 것.


하지만 청소는 내가 치운만큼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인다.

어느 자기계발서에서 삶이 지치거나 힘들 때, 의욕을 잃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청소를 하라고 하는 것은 괜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당신의 하루가 처참한 패배로 끝났더라도, 작은 청소로 기분을 업 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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