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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이 Aug 09. 2024

크리스마스

탁 하고 온 인류가 한순간에 사라져 달라고 빌 것 같아

    7년을 함께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선물을 놔두자고 그것을 우리 집 전통으로 하자고 신신당부했는데 지켜진 적은 없었다. 남편은 선물을 고르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딸아이는 공룡 장난감, 남편에게는 부드러운 머플러를 선물했다. 나를 위한 선물은 없었다. 신혼 초에 내 용돈으로 장만한 조잡한 플라스틱 크리스마스트리 사이로 조명이 깜박깜박거린다. 여전히 그는 육체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늘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신과 약을 먹을 때는 모든 욕구가 감퇴하였다. 희로애락 모든 것이 말이다. 성욕이 높았던 내가 남편을 욕망하지 않자, 우리 사이는 충실하고 믿음직한 형태로 바뀌고 있었다. 더 이상 나는 남편에게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았고 남편은 마음껏 게임을 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딸아이에게 알라딘과 요술램프 책을 읽어주면서 잠시 남편이 만화를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함께 만화영화를 잠시 보게 되었다. 문득 나는 남편에게


“오빠의 세 가지 소원은 뭐야?”


라고, 묻게 되었다. 그러자


“이 장면만 보고… 나중에…”


딸아이가 잠들고 우리 부부는 티브이를 보며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그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남편은 대답했다.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탁 하고 온 인류가 한순간에 사라져 달라고 빌 것 같아 “


난 뇌가 정지된 것 같았다. 정말 남편은 행복하지가 않은가 보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너는?’이라고 물었다. 내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이 사람의 특징이었지만 심리 상담을 통해 나아졌다. 나는 솔직하고 담백하고 내뱉어보았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은 의식을 거치지 않고.


"첫 번째는, 오빠가 쾌활하고 좀 더 능동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거야. 두 번째는, 내가 전문직을 갖게 되면 좋겠어. 세 번째는, 어디든 살고 싶은 곳에 집이 있으면 좋겠어"


남편은


"그렇게 쉬운 소원이 어딨어?”


했다.


“이거야말로 절대 이룰 수 없는 소원이라고”


내가 말했다.


“우주를 가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구시렁대며 조이스틱을 집어 들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소원을 빌며 난 잠자리에 들었다.  





“마법의 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곳을 들어가면 아무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곳이에요. 그곳에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싶어요. 포동포동 살이 올라와도 걱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아니… 이건 남편이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진 않는 문제잖아요?"


나는 상담하며 말했다.


“아니, 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3킬로그램이 준다고 해서 남편이 섹스할 일은 없을 거예요. 이건 자립에 대한 문제예요. 중력을 거스르더라도 … 그러니까 가난하게 살더라도 남편을 떠나서 하루라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아야겠어요. 전 ‘안정’이란 결혼한 것 같아요. 따스한 집. 보호막, 울타리. 결혼 이란 시스템. 그것과 사랑에 빠진 거죠. 이 인형의 집을 나와야겠어요. 그게 바로 제가 저를 찾는 길이 아닐까요? 이건 죽은 삶이에요”


나는 생각을 가다듬고 또 말했다.


“선생님… 저 회피하는 걸까요? 문제로부터의 도망?”  





    오늘 아침에 남편은 나를 뒤에서 살포시 안았다. 그리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로 살짝 떨리듯 말했다.


“내가 마음을 잘 몰라줘서 미안해”


남편의 마음이 전해졌다. 가슴에 탁 막혀있던 딱딱한 무언가가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우리 관계를 생각하며 절망하며 잠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마음이 풀리다니 정말 나는 줏대가 없는 것 같았다. 내 중심이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이라니. 아침에 생리를 시작했다. 생리 전증후군 때문에 유독 예민했던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갑자기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자고 집을 나서자고 했다. 예약하지 않아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도서관에서 희나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남편에게 둘러보라고 하고 희나와 시간을 가졌다. 그리곤 생각했다. ‘내가 반대로 남편에게 희나를 맡기고 좀 둘러보겠다고 했다고 해봐. 언제나 짜증 내면서’ 남편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돌아왔을 때 난 말했다.


“봐봐. 이렇게 쇼핑몰에 나오면 돌아가며 희나를 봐도 좋잖아. 오빠는 맨날 내가 좀 일 좀 보면 화내더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린 차례가 되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다.


“우리도 대화 좀 하자. 응?”


 “무슨 말? 할 얘기가 없는데.”


“음 어떻게 지내요?”


난 장난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무런 답변도 돌아오지 않았다. 희나는 태블릿 피시로 공룡에 색칠 중이었다.


“어떻게 오늘은 내게 사과하게 된 거야?”


“상담사가 말한 우리 반복적인 사이클에 대해 생각해 봤어. 우리 문제를 놓고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가 힘을 합쳐 문제를 물리쳐야 하는 것”


“그렇구나. 좋네. 그냥 그것만 기억해 주면 좋겠어. 난 화랑, 짜증에 민감하다는 것. 오빠가 그러면 난 너무 슬퍼져”


“글쎄, 사람이니까 화도 낼 수 있지. 내가 화를 내지 않는 것보다 나는 네게 감정 표현을 해줘야 해.”


무슨 말인지 더 듣고 싶어졌다.


 “감정표현… 어제 같으면 어떻게 해야 했는데?”


“뭐…. 제이 마음이 안 좋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감정 표현”


난 이 사람의 지능을 사랑했다.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 심리적인 부분은 그에게 꽤 어려운 분야일 텐데 나름대로 잘 해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미처 몰랐던 남편의 의지를 알게 되어 기뻤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안방 공기청정기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바람이 부는 소리였는데 눈을 감고 있으니, 텍사스의 들녘이 그려졌다. 여름밤 비 오기 전 스산하게 불던 바람과 보라색 하늘 색깔. 난 펄럭거리는 짧은 치마를 휘날리며 알렉스 집 마당이 뛰어다녔다. 고양이 새끼들이 여섯 마리 있었는데 까맣고, 갈색이고 까맣고 갈색이고 흰색의 고양이들이 귀엽게 날 쳐다보고 있었던 것도 기억났다. 텍사스 하늘은 광활하고 땅은 거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거기서 꼭 오늘과 같은 바람 소리가 났었다. 난 알렉스가 시덥지않게 말을 반복했던 이유가 술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알렉스 할머니의 조그만 티브이를 보았다. 알렉스가 퇴근하며 사 온 아주 커다란 감자튀김 과자를 맥주와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냈었다. 사랑은 폭죽 터지는 알록달록한 밤하늘 같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간 나른한 오후도 한껏 부풀어 오른 희망과 함께 아름다운 그림이 마음에 자리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쓰라린 아픔과 고독으로 끝을 맺더라도 내가 사랑했던 모든 순간을 결코 되돌리고 싶지 않다. 남편은 시시때때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때마다 난 그것을 견디는 힘이 생길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다운 오늘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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