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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주 Oct 06. 2023

분노는 나의 힘 (3)

  서보라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아정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 왔다. 산골 작은 시골 학교에 새로운 아이의 등장은 단연 큰 화제였다. 첫인사 때부터 야무지고 당당한 인상을 남긴 서보라는 알고 보니 언변도 좋고 공부도 잘했다. 덕분에 보수적인 동네의 텃세에도 불구하고,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아이들 무리에서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아정과 서보라는 한 학기 내내 붙어 있던 자리 탓에 가까워졌고, 그다음 해에도 같은 반이 되었다. 

  어느 날, 이아정은 종례 후 빈 교실에서 빨간색 비즈 팔찌 하나를 주워 제 팔목에 찼다.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 날 주인을 찾아 줄 생각이었다. 이튿날 아침, 교실에 들어선 이아정을 서보라가 조용히 불러냈다. 서보라는 반 친구 임현아가 잃어버린 팔찌를 찾고 있다며, 이아정이 전날 하굣길에 차고 있던 팔찌에 대해 물었다. 문방구 앞에서 마주쳤을 때 자신이 보았다고 했다. 거리낄 것이 없었던 이아정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러자 서보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널 믿어. 그런데 널 믿지 않는 애들도 있을걸. 걱정 마. 내가 잘 말해 줄게. 대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현아에게 사과해 줘.’ 이아정은 서보라가 시키는 대로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팔찌를 주인에게 돌려주며 사과했다. 그것은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친 것에 대한 사과였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사과를 했다’는 사실에 집중했고, 이아정이 팔찌를 훔쳤다가 서보라에게 들켜 돌려주었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서보라는 앞장서서 이아정을 변호해 주었다. 팔찌를 가져간 것보다 돌려준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이아정은 용감했고 그 용기는 칭찬받을 만하다고. 이아정은 그런 서보라가 고마웠다. 한 학년에 반이 두 개뿐인 작은 학교에서 6년을 함께하다 보면 모두 아는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곧 한번 붙은 꼬리표를 떼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서보라는 여전히 이아정을 곁에 두었고, 덕분에 이아정은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이아정이 조금만 더 야무진 아이였다면 서보라의 개입이 외려 제 행위를 고의적인 범죄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원래부터 팔찌를 돌려줄 생각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변호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짚고 넘어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이아정은 어리숙했고 상황을 바르게 판단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아정은 서보라에게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서보라가 등을 돌리면 언제든 제 처지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보라는 달라진 이아정의 태도를 금방 알아차렸고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한쪽으로 기울어 갔다. 이아정은 서보라의 눈치를 보았고 서보라는 이아정의 행동을 감시했다. 서보라는 기어코 이아정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아이들 앞에서 지적했다. ‘이아정은 좋은 애야. 한 가지만 고친다면 더 좋을 텐데.’ 서보라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나면 별것 아니었던 문제도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새 이아정은 친구들 사이에서 반드시 고쳐야만 하는 문제가 있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이아정을 배척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아정이 제 문제점을 고치기만 한다면. 이아정은 저와 서보라의 관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따져 묻지 못했다. 서보라가 제 손을 놓아 버릴까 두려웠으니까. 

  이아정은 서보라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은 이아정의 편이 아니었다. 팔찌 사건으로부터 일 년 뒤, 교실에서 진짜 절도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이들의 의심은 가장 먼저 이아정을 향했다. 지워진 줄 알았던 과거는 서보라의 그림자 아래 잠시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서보라는 쑥덕이는 아이들 앞에서 이아정의 가방을 검사했다. 다들 서보라가 친구의 누명을 벗겨 주기 위해 그런 일을 했다고 여겼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아정은 제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거침없이 가방을 뒤엎는 서보라의 손길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널 심판할 수 있고 네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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