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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주 Oct 06. 2023

분노는 나의 힘 (5)

  2년 전, 이아정은 동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축구 교실을 찾았다. 동윤은 그곳에서 윤채영의 아들 정하준과 가까워졌다. 아홉 살 동갑내기인 두 아이는 이내 단짝이 되어 축구 수업을 마치면 서로의 집으로 향하곤 했다. 덕분에 이아정과 윤채영 역시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들이 공을 차는 동안 학부모들은 체육관 내에 마련된 카페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모임이 형성되면 그 안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카페 모임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바로 윤채영이었다. 윤채영은 리더십이 있었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꼭 짚고 넘어갔으며 필요한 경우 사람들을 모아 목소리를 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윤채영을 주축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자기 영향력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영리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이아정은 그런 윤채영이 어려웠다. 윤채영의 행동과 말투는 서보라를 떠올리게 했다. 친근하게 굴다가 돌연 냉정하게 돌변하고, 노련하게 욕망을 감추며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사람. 그 앞에서 습관처럼 굴복의 자세를 취하게 될까 봐, 항상 경계해야 했다.

  축구 교실은 입문반부터 초급자반, 중급자반, 상급자반, 그리고 선수준비반으로 나뉘었고 분기별로 승급 테스트를 진행했다. 동윤은 축구 교실을 다닌 지 10개월이 되었을 즈음, 상급자반으로 올라가기 위한 테스트를 받았다. 테스트 결과, 상급자반에 들어가게 된 아이는 동윤을 포함해 단 둘뿐이었다. 아이의 성취가 자랑스러웠던 이아정은 그날 저녁 작은 케이크를 준비해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런데 결과 발표 다음 날부터 학부모들 사이에서 테스트 심사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들은 마땅히 올라가야 할 아이를 두고 기준 미달인 아이가 올라갔다며 심사의 공정성을 의심했다. 높은 반으로 올라갈수록 아이의 진로를 계획하는 학부모가 많았기에 분위기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윤이 이야기가 아닌 거 알지?”

  카페 모임 중 실력 미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윤채영이 이아정에게 속삭였다. 학부모들이 문제 삼은 수강생은 동윤과 함께 테스트를 통과한 또 다른 아이였다. 동윤보다 한 살 많은 그 아이는 평소 짓궂은 장난으로 자주 주의를 받는 편이었다. 아이의 부모는 카페 모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비추더라도 일을 핑계로 금방 자리를 뜨곤 했다. 이아정은 축구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그 애의 실력이 그렇게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찬스를 만드는 센스가 있었고 순발력도 좋은 편이었다. 사람들이 아이의 축구 실력이 아닌 그 아이와 아이의 부모를 평가하고 있다고 느꼈다. 혹은 결과에 불복해 좀 더 만만한 쪽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일 수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공격의 대상은 언제든 동윤이 될 수도 있었다. 다들 내색하고 있지 않을 뿐, 그들 마음속에서는 이미 동윤에 대한 평가가 내려졌는지도 몰랐다. 이아정은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점점 불편해졌다. 그런 이아정의 마음을 안다는 듯, 윤채영이 말을 꺼냈다. 

  “아정 씨가 이야기를 꺼내 보는 건 어때? 심사 기준을 공개해 달라고 말이야. 떨어진 애 부모보다 붙은 아이 부모가 건의하는 게 그림이 더 나을 거 같은데. 괜히 찜찜한 말 나오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해 두는 편이 동윤이한테도 좋지 않겠어? 이런 분위기면 동윤이도 억울하잖아. 동윤이는 자기 실력으로 올라간 건데. 안 그래, 아정 씨?”

  윤채영은 다른 엄마들을 ‘누구누구 맘’이라고 칭하면서 이아정만은 ‘아정 씨’라고 부르곤 했다. 아이들이 친하다는 이유로 친근함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이아정은 그 호칭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윤채영의 말에 사람들의 관심이 이아정에게로 옮겨졌다. 이아정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굳이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절한다면 동윤까지 부당한 평가를 받게 될 것 같았다. 제 반응을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이아정은 문득 서보라에게 소지품 검사를 받던 날을 떠올렸다. 쏟아지던 의심의 눈초리, 도둑질하지 않았는데도 도둑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 심판자의 눈으로 부탁한 적도 없는 자비를 베풀던 서보라. 이아정은 결국 윤채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집으로 돌아온 이아정은 뒤늦게 자신이 화를 냈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아이는 최선을 다했고 올라갈 만했다고 말했어야 했다. 윤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테스트를 통과하고 기뻐하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자 못난 자신을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거실에서는 동윤과 하준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축구 수업을 마친 뒤 동윤이 하준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윤채영의 아들 정하준은 제 엄마를 닮아 자신감 넘쳤고 의견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반면 이아정의 아들 김동윤은 욕심이 없는 편이었고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는 편이었다. 이아정은 동윤의 순하고 배려 있는 성격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날은 차라리 아이가 제멋대로 자랐으면 했다. 게임을 하면서 자꾸 하준에게 맞춰 주려 하는 모습마저 꼴 보기 싫었다. 그동안 이아정은 다른 학부모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도록 애써 왔다. 자신이 우습게 보이면 동윤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채영은 종종 이아정의 진짜 모습을 안다는 듯 굴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이아정은 제 빈틈을 감추기 위해 허둥지둥해야 했다.

  윤채영은 서보라가 아니다. 윤채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서보라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이아정의 피해망상일지 모른다. 서보라는 핑계일 뿐, 자신은 원래 비굴하고 형편없는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힘 앞에 무릎 꿇고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비겁하고 빤한 인간. 이아정은 이내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문제를 외면하고 싶어도 동윤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달아날 수 없다면 달라져야만 했다. 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무엇이 이아정을 도울 수 있을까. 

  이아정이 블로그에서 기형도의 시를 발견한 것이 바로 그날이었다. 이아정은 노래를 듣거나 영화를 보며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짧은 문장 때문에 울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장을 이룬 글자 하나하나가 제 오래된 상처를 감싸 안아 주는 기분이었다. 이제껏 그 누구도 저를 위해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시가 읽고 싶어진 이아정은 기형도의 시집을 샀다.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난 뒤에는 다른 시인들의 시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제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하면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스쳐 지나가는 것일 줄 알았던 열정은 예상외로 오래 지속되었다. 새삼 시인이 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정하고 폭신한 문장들, 또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고 냉철한 문장들을 모으는 게 좋을 뿐이었다. 

  첫 시 수업 시간, 강의실에 둥글게 둘러앉은 수강생들은 수업을 맡은 시인의 지도에 따라 시가 자신을 찾아온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인은 학창 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뽑아 든 시집을 말했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 받은 책을 떠올렸고, 처음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부터 시를 읽고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아정은 어느 날 불쑥 제 안에 들어온 문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같은 문장들을 읽다 보면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이아정의 말을 듣던 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문장에는 그런 힘이 있죠. 이아정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힘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튼튼한 갑옷처럼 저를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시를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다만 마음을 마주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제 안의 비루함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끄집어내어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못난 부분이 아니게 될 것이니까. 견고한 문장들은 이아정이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줄 테니까.

  그래서 계속 읽고 썼다. 속이 든든해질 때까지 시어들을 탐욕스럽게 삼켰다. 마음이 통하는 시를 읽으면 깊은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이아정은 계속 그렇게 시를 사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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