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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주 Oct 06. 2023

분노는 나의 힘 (6)

  그런데 이아정은 왜 시를 그만두게 되었나. 시인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아정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려 했다. 더는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즐겁지 않다고. 누구보다 가깝게 여겼던 연인이 어느 순간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떠나는 것처럼 시가 자신에게서 멀어져 버렸다고. 그러나 그런 비유는 상대의 경험에 기대어 공감을 구할 뿐, 이아정이 처한 상황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야기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석 달 전, 이아정은 함께 수업을 듣던 사람에게 정오후의 시를 추천 받았다. 시가 마음에 들었던 이아정은 그가 쓴 시집도 찾아 읽었다. 정오후는 모두 두 권의 시집을 냈는데, 첫 책에서는 불안 속에서 찾아낸 안녕의 가능성을, 그다음 책에서는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불합리한 세상을 포용하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었다. (책에 수록된 해설에 의하면 그랬다) 정오후의 문장은 이른 봄 날씨 같았다. 따뜻하고 포근하다가도 종종 변덕을 부려 매서운 바람을 일으켰는데 이상하게 그 바람이 이아정을 안정시켰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머릿속에 어떤 풍경들이 떠올랐다. 선뜩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그 풍경은 외면하고 싶다가도 곧 다시 돌아보고 싶어졌다. 

  이아정은 특히 「유령의 성전」이라는 시를 좋아했다. 그 시에는 오래된 폐가와 그곳을 떠도는 유령들이 등장했다. 고스트 헌터들의 사냥을 피해 폐가로 숨어든 유령들은 그곳에서 희미한 손을 맞잡고 서로의 비명을 삼켜 주었다. 스스로 공포의 대상이 되기를 택했으면서도 정작 오랜 어둠과 살아 있는 것들을 두려워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자신이 아는 유령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아정에게 유령이란 두려우면서도 애처로운 존재였다. 마주하고 싶지 않으나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줄 벗이었다.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 시를 읽으며 비로소 유령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이아정은 정오후가 분명 저처럼 유령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오후는 시집 외에도 한 권의 산문집을 출간했는데 삼 년 전 나온 그 산문집을 마지막으로는 더 이상의 활동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아정이 찾은 정보에 의하면 그는 난치병을 앓고 있으며 산문집에 그의 투병 생활이 담겨 있다고 했다. 투병이라는 말이 무겁게 느껴졌던 이아정은 미루고 미루다가 보름 전쯤에야 그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염려했던 것보다 병에 관한 글은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시인이 겪은 일과 그 경험이 시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정오후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읽던 이아정은 어쩐지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꺼림칙한 기분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시인에 관한 기사와 글들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나온 사진을 찾아냈다. 끝이 살짝 올라간 큰 눈, 살짝 각이 진 턱과 유난히 긴 목.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 이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오후의 본명이 함께 기재된 등단 관련 기사도 찾아냈다. ‘서보라’. 그 이름이 또다시 이아정 앞에 나타났다.

  이아정은 정오후의 시집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번 읽은 시였는데도 전혀 새로운 시를 읽는 기분이었다. 미백색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들은 분명 그대로일 텐데. 그러니까 그 안에 담긴 풍경들은 이미 이아정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유령의 성전」에 나오는 반쯤 허물어진 폐가, 「그믐」에서 묘사된 길게 이어진 산등성이와 그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산짐승 소리, 그 밖에도 길고양이들이 나란히 앉아 햇볕을 쬐던 단란주점 앞 난간과 비가 올 때마다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기던 흙길까지. 정오후는 그 공간 위로 흐르던 시간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아정의 존재는 말끔하게 도려내져 있었다. 

  정오후의 독자들이 쓴 리뷰에는 얼마 전까지의 이아정처럼 위안을 얻었다는 내용이 다수였다. 해박한 지식을 가졌을 평론가들도 진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반복되는 이해와 포용의 시도’, ‘따듯한 시선’ 따위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이아정이 기억하는 서보라의 눈은 쌀쌀맞고 오만하기만 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게 우스웠다. 그러나 가장 우스운 것은 자신이었다. 지금껏 정오후의 시를 읽으며 느꼈던 그 감동은 다 무엇이었을까. 정오후가 저와 같은 유령을 보았으리라고 믿었던 것은? 이아정은 지금도 저를 감싸 안던 유령의 서늘한 품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보라가 결코 그와 같은 것을 느꼈을 리 없었다. 자신은 대체 무엇을 착각하고 있었던가.

  이아정은 전과 같이 시를 읽고 쓸 수 없었다. 진실하게 여겼던 문장들도 그저 잘 만든 거짓말처럼 보였다. 거짓 문장에 농락당했던 날들이 억울했고 그것을 소중히 여겼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다. 만약 정오후의 시들을 알지 못했더라면, 이아정은 계속 시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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