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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진주 Oct 06. 2023

분노는 나의 힘 (1)

  이아정은 시집을 버리기로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사 모은 그것들은 거실 4단 책장의 맨 아래 칸을 채우고 있었다. 나머지 칸은 아들 동윤의 동화책과 학습 만화책, 그리고 남편의 실용서 차지였다. 평소 빈약한 장서를 부끄럽게 여겼는데 책장을 비워야겠다는 결심이 서자 더 많은 시집을 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엄마, 이거 버릴 거야?”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동윤이 현관 앞에 쌓아 둔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아정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거라고 둘러대었다. 어린 아들에게 책을 버리겠다고 말하기가 왠지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말을 하고 보니 중고 거래 사이트에 내놓거나 지인들에게 주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았다. 그러나 잠시 뒤, 역시 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시집이 빠진 자리는 고작 네 뼘 반 남짓이었는데도 이아정의 눈에는 책장이 텅 빈 듯 보였다. 동윤의 책을 몇 권 더 주문할 생각으로 서점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시집으로 채워진 장바구니도 비웠다. 이렇게 간단히 사라져 버리다니. 한숨을 내쉰 이아정은 책들의 화형식을 거행하는 상상을 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 한 권씩 던져 넣으면 어떨까. 골몰히 들여다보던 페이지가, 홀로 읊어 보던 글자들이 불꽃 속에서 화르르 타올랐다 쪼그라들고, 마침내 까만 재로 변해 흩날리겠지. 그러고 나면 단지 그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라는 건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지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아정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는 함부로 불을 피울 수 없었다. 버려진 책들은 폐휴지로 분류될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어울리는 마지막일지 몰랐다. 

  헛소리뿐인 문학 따위, 매일 배출되는 쓰레기와 다를 바 없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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