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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Dec 03. 2021

그림자 놀이

도시와 건축을 말하다

그림  이종민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설계사무실에 근무했을 때의 쯤의 기억이다. 나는 폴-루돌프가 설계한 예일대학 건축학부 건물의 텍스츄어와 매스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다. 루이스-칸의 건축 또한 그 정신적 위대함에 앞서 짙은 그림자가 만드는 선명하고 깊은 볼륨이 먼저 다가왔을 때이기도 하였다. 


일종의 매너리즘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그리려는 입면에 실제의 깊이보다 과장된 두텁고도 선명한 음영을 그려놓고서야 만족하곤 하였다. 현실주의자인 나의 선임은 그것에 기울이는 정성과 시간이 늘 불만이었을 테다. 하지만 나는 눈치 보지 않고 집요하게 그 작업에 열중하였다. 내가 다루었던 밋밋한 상업용 건물에 깊이의 변화가 있다면 얼마나 있었을까? 그 비현실적인 깊이의 그림자는 내가 처한 건축에 대한 카타르시스였으며, 말하자면 일종의 꿈이고 환상이었던 것 같다. 


이후로도 그림자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고나 할까? 어느 잡지에 발표한 사진을 주제로 한 수필에 이렇게 쓰기도 하였다. 


- 나의 앨범 목록에‘빛’이란 이름의 폴더가 있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사진은 빛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 모든 사진의 실체이며 주체가 곧 빛이니 따로 분류될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사진의 이미지란 어느 한 시점 카메라의 조리개를 통과한 빛의 변주에 불과한 것이지 빛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빛’이라고 써 놓긴 하였지만, 기실은 빛이 아니라 그림자의 그림이 전부인 셈이다. 빛의 포착은 원천적으로 무리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림자는 빛이 사물을 통과하지 못한 궤적이어서 오히려 빛과 대치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나 보다. 사진, 건축, 그림에서의 내 관심은 여전히 그림자다. 특히 내 건축에 충분히 변주되지 못했던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생각해보니 수필에서 썼듯이 빛과 그림자가 동체였음은 사실이었다. 그림자는 유형의 실체를 만들지만 빛은 좀체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을 뿐. 하지만 그림자가 빛의 존재를 낱낱이 폭로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 이쉬움의 실체. 내 욕망이 빛이었다면 그림자는 내가 이룬 건축이 아니었는가. 좀체 버리지 못하는 나의 미련 속에 건축이란 그림자는 여전히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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