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말하다
그림 이종민
온정리 해변에 가면 다양한 표정의 바다와 물결을 비집고 늘어선 올망졸망 바위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앨범 속의 한 컷인 양 내 기억에 자리하며 가끔 내게 수다를 떤다. “야! 이럴 땐 바다로 나가란 말이야. 거기서 그것들과 어울려 보아.”
이만치 싫증이 나지 않는 풍경도 없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라 할까? 열렬히 사랑하여야만 숨통이 트일 것만 같은. 거기에 늘어선 몇 개의 신축 건물들과 새로 생긴 도로는 내 관심 밖이다. 늘 등 뒤에 서게 되는 그것들은 나의 풍경이 되지 못한다. 오로지 바다의 격정과 바위와 나무들의 두런거림만이 나를 불러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경계에 인위적으로 나무를 심곤 한다. 마치 바다를 향해 선전포고라도 하듯 계획적이고 도전적으로. 사람들은 얼마 후 나무가 사람의 뜻보다는 바다와 바람의 질서를 더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나무는 점점 자신의 길을 간다. 종내에 바다를 향하고 유연하게 바람을 탄다. 마치 내가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 도로를 등지듯. 그때 비로소 나무도 내 풍경으로 들어오게 되고, 나는 나무를 그려 보기로 한다.
그림을 올린 내 인스타그람을 방문한 어느 분께서 댓글을 달아 주었다. “바다에 늘어선 소나무들이 듬직해 보이지만 사실은 수다스러운 느낌을 숨길 수 없습니다.” 나는 그 감상이 참 좋았다. 그이의 눈이 내 눈보다 더 정확하고 옳았다. 듬직하기를 바란 것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욕망이었다면, 바다는 가지와 잎을 이처럼 수다스럽게 변모시켰을 게다. 그이의 표현처럼 나무는 바다에 말을 걸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기도 하고, 때론 격렬하게 부르짖기에 하였으리라. 그리하여 몸은 쏠리고 비틀어지고, 가끔 사람들이 제 몸에 기대어 짜증스럽더라도 나무는 행복했으리라.
나무는 여전히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뿌리가 썩고 잎이 말라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러한 나무의 본성과 순수 앞에 잠시 서고, 그 거친 등걸에 내 손을 얹고 잠시 나무의 순수를 위로하였다. 나무야 나무야. 수다스러운 나무야! 그러한 너의 자유를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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