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다고 말을 잘 못한다.
불편하다고 말을 잘 못한다.
싫다고 말을 잘 못한다.
아프니까 강도를 낮춰 달라는 말을 잘 못한다.
거절은 더 못한다.
이게 다 뭐냐면, 결국 내가 나로서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한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깨와 허리에 침을 맞기전 전기치료를 한다. 고무 같은걸 통증 부위에 부착하는식인데, 간호사는 내가 따로 말을 하지 않으니 아래 허리쪽에 치료기를 부착했다. 그때 일반적인 사람은 위치 조정을 당당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족히 네가지는 넘는 생각을 하는거다.
'사람도 많은데 말하면 너무 진상 같겠지..?'
'그래. 다 같은 허리인데 오늘은 그냥 이 부위에 맞자.'
'바꿔달라고 하면 간호사가 귀찮아 하지 않을까?'
'상처 받으려나..?'
이정도면 몽상가 내지는 망상가다. 실질적으로 나는 죽을때까지 그 간호사의 당시 속마음을 알 수 없다. 좀 더 와닿게 말해보자면 간호사는 그 순간 아무 감정도 생각도 없었을 확률이 99%에 달한다고 본다.
그럼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저렇게 간호사를 위해주고 병원의 상황을 이해해준다고 달라지는게 뭐가 있을까? 나한테 도움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가? 좋은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겠다. 그들의 점심시간에 '다루기 쉬운 손님'이란 주제로 얘기가 나온다면, 나는 꼭 그 범주에 들어가겠지. 그런데? 그 범주에 들어가면? 내가 한방병원의 VVIP가 되어 호사를 누릴 수 있는가? 바쁜 간호사를 위해 아무곳이나 치료를 한 내 얘기에 감동한 대통령이 표창이라도 내리는가?
그냥 아무짝에 쓸모 없는 배려인거다.
'나는 나다'
정당한 요구와 합당한 의사소통을 위한 힘은 나한테 있다. 그 힘을 제지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없다. 나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해주세요', '싫어요', '부탁해요' 등은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저 여기가 좀 불편한데.. 위치 바꿔주실 수 있나요?”
간호사는 누구보다 상냥하게 위치를 바꿔줄 것이다.
“제가 오늘 피곤해서.. 회식 못갈 것 같아요”
옳은 이유로 솔직하게 거절하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다. 도살장 끌려온 소마냥 자리를 지킨다고 나한테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다. 기억해라. 그들은 나를 억지로 끌고오지 않았다. 만약 내가 없는 회식자리에서 내 욕을 했다해도 그냥 넘겨라. 어차피 나도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잖아? 내가 그들을 버린거다. 그들이 나를 버린게 아니다. 그리고 나를 부정적으로 얘기할 권리는 그들에게 있다. 그것까지 내가 통제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선택한다. 혹시 상대가 내 의사표현에 불편한 기색을 한다해도 그 책임은 나한테 없다. 내가 상대에게 불편감을 줄 의도가 없었다면 더 떳떳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 감정은 오롯이 상대방의 것이다. 상대를 통제할 권리는 상대 자신에게 있다. 내가 상대의 감정에 위축되어 내 의사 표현을 미뤄야하는 이유가 0에 수렴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상대의 반응이 좋지 않다고 해서 내 의사표현의 기회를 모른체하면 더욱 안된다. 언제까지 상대만 바라보는 외사랑 같은 삶을 살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유있는 거절, 정당한 요구에 인상 쓰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부터 나와 그 사람을 분리 시키자. 그 사람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을 선물할 사람이다. 그런 선물을 받기 위해 나를 갉아먹는자를 옆에 두지 말자.
나는 나다. 지나친 배려로 나를 잃고 물에 물탄 듯 희미한 사람이 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