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도 아빠의 휴대전화는 쉬지 않고 울린다. 미리 맞춘 알람 대신 전화 벨소리가 울리고 통화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새벽 5시에도 큰아버지의 전화로 깼었는데 다시꿈을꾸고 있는 걸까? 통화를 마친 아빠에게 침대에 누워서 졸린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묻는다.
“지금 몇 시예요?”
“7시(가 되기까지) 10분 전이야.”
“으… 우리 7시에 일어나기로 했잖아요. 알람도 맞춰 놨는데.”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린 휴대전화 소리가 미안한 아빠는 진동 모드로 바꾸었다. 그래도 오는 연락을 막을 수 없어서 지잉-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한다. 외출 준비할 때, 호텔 로비에 잠시 앉아있을 때, 쉴 새 없이 전화가 오고 간다. 휴대전화 속 인물은 계속 달라진다. 아까는 거래처였는데 잠시 후엔 함께 일하는 직원이었다.
한바탕 통화가 끝나고 호텔 밖으로 나와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으로 걸어갔다. 더르바르는 왕궁이라는 뜻이며 카트만두 외에도 파탄과 박타푸르라는 도시에 있는 광장이 유명하다. 각종 힌두교 사원과 탑, 조각상을 볼 수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네팔의 주요 명소다. 하지만 2015년 발생한 네팔 대지진으로 인해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의 대부분이 훼손되었고 지금까지(2020년 1월) 복원 중이다.
광장으로 향하는 아빠와 딸은 '여행'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정석이었다. 타멜거리를 지날 땐 알록달록한 캐시미어 제품들과 다양한 기념품에 넋 놓고 시선을 빼앗겼다. 광장 입구와 거리에 늘어선 금은방 앞을 누빌 땐 아빠와 다정하게 셀카도 찍었다. 광장 안 사원의 빨간 지붕과 바닥을 가득 채운 비둘기 수백 마리의 고고한 자태에 함께 경악하기도 했었다.
잠시 쉬기 위해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이 한눈에 보이는 2층 카페로 들어왔다. 네팔에서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답게 쾌적하고 내부 인테리어도 깔끔했고 셔츠에 갈색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들도 아주 친절했다. 커피와 차는 물론이고 각종 스무디와 샌드위치 등 메뉴 종류가 다양했다. 네팔에서 처음 온 카페였고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방긋 웃으며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케이크는 뭐 시킬까요?”
“네가 먹고 싶은 거로 시켜. 아빠는 아무거나 괜찮아.”
아빠는 뜨거운 민트차를 고르고 바로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익숙하고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이 들린다. 곧이어 주문한 당근 케이크, 치즈케이크, 민트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아빠는 통화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격양된 목소리로 열을 내며 연신 차만 들이키신다. 혼자 절반 가까이 먹은 케이크는 맛있었지만, 말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통화가 끝나면 같이 먹으려고 혼자서 한 판 거뜬한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조금씩 긁어가며 아껴 먹었다. 휴대전화로 다음에 갈 장소를 다시 한번 검색하고 카페 구석구석 사진을 찍는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창문 밖을 바라본다. 카트만두의 하늘은 푸르고 광장 옆에서 골동품 벼룩시장이 열렸다. 관광객들이 구릿빛을 띠는 물건들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평화롭고 이국적인 풍경에 시끌벅적한 통화내용이 섞여 자막이 잘못 틀어진 영화를 보는 듯하다. 어디에도 끼지 못한 눈과 귀가 멍하니 방황한다.
통화 중인 아빠에게서 일하는 어른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아빠는 여행이나 휴식을 이유로 이번만큼 오래 쉰 적이 없었다. 취업에 성공하면 아빠처럼 사는 걸까? 네팔에 오기 위해 아빠는 한국에서 어떤 준비를 했을까? 직업을 가진 사람이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두 눈으로 확인한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이루기 위해 아빠가 한국에서 포기한 게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기에 머리는 복잡하고 마음 한구석이 따끔하다.
그래도 여행 온 딸의 입장에서 섭섭함을 감출 수 없다. 가게 안 손님들은 모두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화기애애 이야기꽃을 피운다. 커피의 맛을 즐기고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로 배를 채운다. 덩그러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꽤 고역이다. 더는 투명 인간이 되기 싫어서 온몸으로 신호를 보낸다. 전화를 받던 아빠의 첫마디는 딸이 아빠에게 지금 하고 싶은 말이다.
‘여보세요, 아빠. 저 너무 심심해요!’
한 시간 넘는 통화가 드디어 끝났다. 잔뜩 성난 아빠가 분노를 토로한다. 거래처 사람이 속을 썩이는 모양이다. 평소라면 서운하다고 투덜거렸겠지만,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말로 대꾸할지 몰라 입을 앙다문 채 오물거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색하게 웃는 미지근한 정적을 감지했는지 아빠가 한동안 이어지던 화를 멈춘다.
“이제 전화 안 할 거야. 다른 사람한테 하라고 했어.”
그제야 아빠는 남겨둔 케이크를 입에 넣는다. 커피가 맛있냐고 묻고 이미 식어 버린 민트차를 권한다. 딸은 이제 형태를 알 수 없이 망가진 케이크를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살짝은 어색하고 불편한 적막이 흐른다.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서 카페를 나선다. 아까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탓일까? 오늘따라 유독 입안에 씁쓸함이 오래 남아 텁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