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묻는다. 딸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지금 할 일이 없다.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포카라는 액티비티를 제외하면 볼거리가 많지 않았다. 근교로 나가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세계 평화의 탑이나 데이비스 폭포에 갈 수도 있지만, 사진을 보고 후기를 읽을수록 아빠의 흥미를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늘어지게 쉬면서 트레킹을 위한 체력이나 보충할 예정이었다. 숙소에 가만히 있기엔 심심해서 어슬렁어슬렁 포카라 골목을 걷는다.
포카라 시내 중심거리는 관광지답게 멋 부린 식당이나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알록달록한 수공예품이 눈길을 사로잡고 즉석에서 갈아 만드는 생과일주스를 파는 자전거 노점이 있다. 밤이면 고급 식당과 바에 조명이 반짝반짝 빛나고 호객꾼들이 관광객을 부른다. 몇 차례나 둘러본 중심거리 대신 가보지 않은 호텔 뒤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오후 3시,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니 거리는 고요하고 한적하다. 어제부터 교복 입은 학생들이 호텔 앞을 지나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에 학교가 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학교 앞 구멍가게가 자리를 지키고 맞은편엔 간단한 간식을 파는 음식점이 모여 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포카라의 조용한 골목을 전세 낸 듯 돌아다닌다. 중심 거리와 비교해서 훨씬 일상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화려한 헤어스타일의 모델이 찍힌 미용실 입간판을 지나서 발견한 옷가게엔 걸려있는 옷이 별로 없다. 어느 돌담 사이에 자란 싱그러운 유채꽃에 걸음을 멈춘다. 아빠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저기 봐. 바나나 보여? 이야, 동네에서 바나나가 자라네.”
“어디요?”
“저기 나무에 달린 저거 바나나잖아.”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바나나를 찾는다. 정돈되지 않은 리조트 뒤뜰에 키가 성인 남성 세 명의 키는 가뿐히 넘을 듯한 나무가 있다. 꼭대기에 머리카락처럼 달린 푸른 잎 사이로 연두색 바나나 두 송이가 매달려 있다. 마트에서 흔히 보던 바나나가 여행에선 훌륭한 탐구 대상이 된다.
누군가의 일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래도 포카라는 유명한 관광지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여행사와 호텔, 게스트 하우스가 곳곳에 숨어있다. 숙소는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하기 때문에 묵고 있는 곳 외엔 본 적이 없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외관의 호텔이 더러 보인다.
“저긴 시설이 엄청 좋아 보이는데요?”
“그러게. 오, 고급스러운데?”
잠시 뒤 어느 호텔에 관광차가 줄지어 들어가는 모습에 우리끼리 멋대로 추측한다.
“저긴 단체 관광객을 받는 호텔인가 봐”
“사람들이 입구부터 막 서 있네요.”
남의 숙소 구경을 끝으로 우리 숙소로 돌아간다. 저녁을 먹기 전 미리 씻어야 한다. 이번 숙소는 밤이 되면 방 안으로 매서운 한기가 몰려온다. 따뜻한 물이 나와도 머리를 감거나 샤워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비교적 온도가 높은 낮에 씻고 6시에 나가기로 했는데, 5시가 조금 넘자 아빠가 침대에 가만있지 못하고 분주하다. 5분 간격으로 딸에게 묻는다.
“머리도 아직 안 말렸어?”
“(양말을 신으며) 준비했으면 나가지?”
“(겉옷을 입으며) 준비되면 슬슬 나갈까?”
“(가방을 메며 딸의 동태를 살핀다) ……..”
허겁지겁 머리를 말리는데 곱슬머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거울을 보고 자기주장 강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쓱쓱 펴보려고 애쓰다가 아빠에게 고개를 돌린다.
“지금 머리 어때요?”
“좀 별론데, 여기가 붕 떠 있고 부스스해서”
“아이, 참! 그냥 괜찮다고 하면 나갈 텐데!”
아빠는 아무래도 딸의 마음을 너무 모른다. 짧은 머리를 수건으로 탁탁 털면 되는 아빠와 다르게 딸의 머리는 숱 많은 단발머리고 극심하게 손상된 모발이라서 금방 마르지 않는다. 머리가 이상한 건 이미 아는데 아빠까지 솔직하게 말해 줄 것 까지야. 투덜투덜 입을 삐죽거리며 가방을 챙긴다.
서로에게 초조한 외출 준비를 마치고 3분 거리의 한식당을 찾아간다. 불그스름하게 노란 조명이 따뜻한 느낌을 주고 식탁이나 식기가 윤기 날 정도로 깨끗하다. 메뉴판을 신중하게 읽은 아빠가 제육볶음과 된장찌개를 주문한다. 곧이어 맛깔스러운 반찬이 나오고 네팔에서 보기 드문 쌈 채소도 등장한다. 하얀 김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촉촉한 흰쌀밥과 시원한 생맥주까지, 한 상 가득 아빠의 취향이다. 음식을 앞에 둔 아빠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딸도 열심히 음식을 입으로 집어넣으면서 아직 마음속엔 외출 준비의 뒤끝이 남았는지 심술을 부린다.
“다음엔 오빠랑 와요. 일어나서 파바박 나오고 파바박 밥 먹고 하면 되겠네.”
“에이~ 아니야. 그런 거.”
“흥! 됐어요!”
밥 먹는 사이 하늘이 어둑해졌다. 조급한 걱정 없이 편히 쉬고 든든히 맛있는 음식을 배를 채웠을 뿐인데, 참 좋은 날이었다. 이런 게 여행이 주는 여유일까? 포카라에 도착하던 날을 떠올린다. 읽지 못할 글자가 적힌 간판에서 풍기던 낯선 공기가 어느새 골목길 사이로 들꽃이 핀 평화로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여행지의 경험이 도시의 인상을 정한다. 이제부터 포카라는 영원히 여유로운 곳으로 남을 것이다.
다음날 트레킹을 위한 짐을 챙기는 하루의 끝마저 평온하다. 트레킹에서는 어떤 일이 생길까? 빵빵하게 가득 찬 배낭만큼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지만, 옅게 깔린 긴장감에 피식 바람이 빠진다. 부디 딱 오늘만큼 잔잔한 기쁨이 남은 시간 동안 이어지길. 생각은 이제 그만. 딸은 내일을 위해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