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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Oct 24. 2021

나는 경이로운 열정을 보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 #03

 타인에게 어떠한 감정을 받고서 나를 무언가에 고취시킨 그런 적이 있는가. 나자빠져 비하감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무심코 스친 만남이 나를 구해준다면, 참으로 영화 같지 않은가.


 대사 같은 한 줄이 실제로 존재했었다.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말이다.




 내만사(내가 만난 사람들)의 첫 사람, 선생님이 나의 꿈을 바라보게 해 준 사람이라면, 지금의 친구는 꿈을 포기에서 멀어지게 해 준 친구이다.


 고등학생 시절, 아마 지금껏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부보단 글을, 독서를. 꿈에 자그마한 새싹을 틔우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던 때였다.


 한창 열기가 달아오른 그때, 다가가기 어려운 친구가 있었다. 같은 친구 무리, 같은 반, 앉은자리도 그리 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다가가기 어려웠다. 용광로에 다가가면 엄청난 열기에 눈앞이 흐려지는 것처럼, 대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학업에 몰두할 때만큼은 정말로 진지했다. 강철을 주조하는 사람처럼, 명장과 같은 집중력이었다. 집중하는 때만큼은 웃음기도 지양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국어 외에는 성적이 불안정한 나였기에, 특히 영어를 잘하는 친구여서 많이 물어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골똘한 모습과 진지한 말투에 괜히 물어본 내가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중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느낌이었다.


 명확한 무언가를 낚아채려는, 종착지를 향해 거침없이 정진하는 사람으로 나에게 똑똑히 각인됐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덮친 불길한 물결에도 그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저렇게 열정이 넘치는 상남자인가?'라는 생각도 꽤 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서로의 인생을 경유하는 이들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다른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바로 예민한 감정 폭과 습관적인 자기 비하였다.


 나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스타일이 다른 그것들이었다. 친구의 일상에는 본인의 능력과 일에 대한 궁금증과 회의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비하를 넘어선 멋진 이들을 만난다. 감정을 다스리고 자기 비하를 추스르며 앞을 뚜렷이 바라본다. 마치 피니시라인이 보이지 않는 마라토너가 흐린 땀을 툭툭 털어내며 열정을 담아 앞을 주시하는 것 같은, 맹렬한 태도였다. 단점처럼 생각하는 그의 성격은 장점을 위한 획기적인 수단이었다.


 친구는 강철을 주조하는 명장이 아닌 강철 그대로였다. 끊임없이 달궈지고 식혀지는, 과연 어디까지 견고해질는지. 어느새 강철을 훌쩍 넘어 다이아몬드가 되어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2020년 초 어두운 물결에 내 게으름은 극에 달했다. 이에 주산물인 안개로 가득 찬 앞길을 만들어냈다. 부산물로는 배짱 두둑한 한량과 같은 마음이었다. 아직까지 내 전생은 한량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흐린 것들을 걷어내고 싶은 욕구에 갑작스러운 서울 여행을 결정했다. 친구가 본격적으로 일에 몸 담고 나서는 처음으로 보는 자리였다. 많이 달라졌었다, 정말로.


 말투부터 시작해서 일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바라던 것들이 다가온 것 같다며 수줍은 뿌듯함을 표현했다. 내가 본 가장 열정적인 사람의 뿌듯함은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뒤따라 나에 대한 근황을 물어봤다. 부끄러웠다. 좋던 나쁘던 결과는 물론이고 과정조차 없었던 나는, 자괴감에 얼버무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 뿌듯한 그 한 마디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잊힐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잠가두었던 문고리를 열었다. 덜그럭, 많이 녹슬고 거무튀튀했다. 쓰라린 마음에 이를 꽈악 깨물고, 울먹이며 다시 꿈을 바라보고자 굳게 다짐했다.




 최근 술을 마시고 친구에게 전화를 한 통 했었다. 내가 존경심을 가진 이들에게 자주 하는, 고질적인 술버릇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고마운 감정을 고백했었다. 마침 또 한 번의 강철이 식는 단계였는지, 내 이야기에 화색을 보였다. 나는 고맙다는 위로를 재차 전했다.


 하루에, 한 시간에, 찰나에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사람을 지금도 보고 있다. 뜨거운 몸체에 거침없이 물들이 달라붙는다. 방금 전보다 견고한 몸체가 빠져나왔다. 채 털어내지 못한 물들에 많은 미련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흐르면 식지만 더욱 단단해지고 빛날 테니 말이다. 그리고 흐르는 것 또한 잘 닦아내리라고 믿는다.


 가장 뜨거운 온도를 지니고 있어서 나만의 혹한으로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마음일 때, 반사적으로 친구를 바라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따뜻해지니 말이다. 네가 가진 그것은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 아닐까. 한 줌조차 되지 않은 열기조차 가둬버린 나였다. 그리고 찰나에 받은 불씨는 지금까지도 내 앞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항상 습관처럼 말하는 '성공하자', '행복하자'의 본연 그대로를 실현할 내 친구의 나날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종착지에서는 친구의 당당한 뿌듯함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P.S // 배경으로 사용된 귀여운(?) 그림은 이번 주인공이 직접 자신을 디자인한 것이다. 진지한 눈썹과 오므린 입술이 유머러스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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