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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Nov 28. 2022

이러려고 퇴사한 게 아닌데.

주간 회고록 : 2022년 11월 넷째 주

이번 주 월요일이 돼서야 진절머리 나게 했던 클라이언트와의 거래를 취소할 수 있었다. 이 스트레스 유발적 의뢰는 사실 3주 전에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랬다고 말하기에는 1주밖에 되지 않은 신입 프리랜서인 나에게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 16쪽짜리 카탈로그를 디자인해달라는 의뢰였다. 짧은 경험상 크몽이나 숨고에서 들어오는 의뢰들은 디자인 능력이나 인력이 없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건은 의뢰자 회사의 디자이너 수가 줄어들어 회사 내 일을 맡아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의뢰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직급, 직무는 일절 알지 못했지만, 의뢰자는 나의 포트폴리오, 경력, 서비스 내용을 보고 요청했다. 의뢰자는 ‘내용은 파워포인트로 내용 작성 및 이미지 위치 잡아, 전달해 드릴 예정이고, 레퍼런스는 러쉬에서 발행한 '러쉬 타임스' 입니다. 깔끔하고 세련되고 가독성 높은 느낌을 희망합니다.’라며 요청사항을 보내왔다. 상담은 더 깊게 진행되었고 의뢰자는 회사 상사에게 내가 준 견적을 허락 맡아야 한다며 며칠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상담한 내용조차 잊힐 때쯤 거래가 시작되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스트레스 또한 시작되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상담과 다르게 바뀌는 컨셉과 디자인 방향성, 보여주었던 레퍼런스의 무쓸모, 24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답변과 그마저도 제대로 답이 되지 않는 답변들 등등. 소통이 잘 안되었고 계속해서 요구사항은 바뀌었다. 그래도 맡은 일이니, 책임감에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하지만 무리한 요구 끝에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요구였다.


의뢰자는 짐작건대 자신의 회사 디자이너와 일하는 방식처럼 일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나에게 한 페이지씩 자신의 컨펌을 받아 가며 진행하자는 요구에 어떻게 대답할까 하다가 ‘내가 왜 이렇게 해주고 있을까?’라고 나에게 말했다. 곧바로 내가 원하고 해왔던 나의 방식을 설명했고, 나의 디자인 서비스는 이런 틀 안에서 움직인다고 이야기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환불해주겠다고 했다. 이미 작업을 시작한 지 1주일이 지나간 상태였다. 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고 노력 끝에 내뱉은 말이었다.


“이렇게 일하려고 퇴사한 게 아닌데 말이야….”


이 에피소드에 관해 누나와 이야기 나누면서 한 말이었다. 이전에 다니던 꼰꼰 건축 퇴사에는 복합적이고 복잡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나만의 일을 찾고 나답게 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퇴사 사유서>에서 오리지널리티니, 아이덴티티니 떠들어놓고 인제 와서 몇 푼 짜리 클라이언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꼴이라니.


만약 내가 특정 회사의 방식에 따라 일하고, 나의 기준 없이 일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했다면 당연히 나는 프리랜서가 아닌 취업은 선택했어야 한다. 몇 푼짜리 돈을 받고 노예처럼 일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었다면 두둑한 월급을 받고 상사와 싸우면서 일하는 것이 백번 나은 선택일 것이다. 애초에 퇴사하고 프리랜서를 택한 이유는 ‘나에게 맞는 일’, ‘내 방식으로 하는 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잠시나마 나는 돈에 홀려 내가 세운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한순간에 내가 프리랜서를 선택이 이유를 깨닫고 빠르게 긍정 회로를 돌려 지금에라도 거래 취소하는 것을 감사히 여기자며 자신을 달랬다. 이렇게 지난주 금요일 점심에 보낸 거래 취소에 대한 답변은 주말을 넘어 이번 주 월요일 오후 4시 29분이 돼서야 돌아왔다.


‘저희도 기대했던 디자인 업무 및 결과물과는 상이한 부분이 있어 거래 종료에 동의합니다. 환불은 진행하되 작업하신 원본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말을 들어보니 기대했던 디자인 결과물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도 작업물 원본을 요구하는 것을 보니, 내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순적인 말을 들으니 후련하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과 일을 온전히 지켰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곧이어 나도 메시지를 보냈다.


‘아쉽게도 원본은 최종적으로 거래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드릴 수 없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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