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락가락한 하루였다. TV에선 역대급 태풍이 북상 중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이른 저녁을 먹고 달리러 나섰다. 빗줄기가 가느다랗게 떨어졌지만, 뛰는 데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늘을 쳐다보니, 1시간은 족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의 목표는 ‘베른트 하인리히’가 2020년 5월 10일에 뛰었다는 6.5km. 가까이 갈 수 없기에 더없이 훌륭해 보이는 꽃같이 아름다웠던 시절을 추억하며 뛰어볼 참이었다. 그 추억 속에 마법 같던 순간들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머리띠를 두르고, 손목시계를 찬 뒤 가볍게 몸을 풀었다. 목과 허리를 돌리고, 무릎과 발목도 돌리고 돌렸다.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들숨과 날숨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면서 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두 바퀴 돌았다. 바닥 곳곳에 비가 고여 있었고, 뛸 때마다 빗물이 들어와 신발과 양말은 금세 젖었다. 비는 오다 멈추다, 멈추다 오기를 되풀이했다. 뜨거운 태양도 없고 비는 적당히 내려서 뛰기에는 그만이었다.
3km쯤 달렸을까.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옷은 비에 젖었고,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꽤 힘이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하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했지만, 이 앙다물고 뛰었다. 비는 세차게 퍼부었다. 악마의 속삭임은 ‘그냥 빨리 뛰고 끝내자’라는 절규처럼 들렸다.
순간, 초중반에 속도를 올리면 안 된다는 조언이 떠올랐다. 아랫배와 괄약근, 다리에 힘 빡 주고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래야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덜 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5km 구간을 돌 때 빗줄기는 가늘어졌고, 거의 그쳤다. 오버페이스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다행히 6km까지 비는 잘 참아줬다.
500m를 남겨뒀을 때 다시 하늘에서 구멍이 뚫렸다. 겨우겨우 6.5km를 마쳤다. 기록보다는 비 오는 날, 생애 최장 거리를 달렸다는 것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대회 당일에도 비가 올 수 있으니 우천 대비 훈련을 제대로 한 셈이다.
인생을 흔히 마라톤에 비유한다. 백번 천 번 공감했다. 급히 서두른다고 해서 먼저 도착하는 건 아니라는 걸. 금방 힘에 부치고, 숨이 찰 따름이란 걸. 쨍하고 해 뜰 날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잔뜩 흐리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도 있다는 걸.
비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내릴 때가 있지만, 소리 내지 않고 부슬부슬 내릴 때도 있다. 그쳤다가 다시 올 때도, 오다가 멈출 때도 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변덕쟁이 날씨처럼.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긴 호흡으로 멀리 보고 가야겠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아야겠다, 40년 하고 몇 년 더 살아온 인생이지만, 내가 마라톤을 하며 배우고 깨달은 공부다. 세상에는 못하거나 안 되는 건 없다. 단지, 안 하는 것뿐이지. 저 포도는 분명히 시고 맛이 없을 거야, 포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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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장에 다녀온 어머니께서 새 운동화를 사 오면 그렇게 좋았다. 얼마나 좋았으면 머리맡에 두고 잤던 기억이 난다. 때가 타기라도 할까, 다 쓴 칫솔을 가져다 벽돌장 같은 빨랫비누에 쓱쓱 닦아 빨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이 마흔다섯에 어머니께 운동화 선물을 받았다.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고 했더니, 모아둔 쌈짓돈 턴 모양이다. 어느 매장에 가서 “질 비싼 걸로 줘유”라며 사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학창 시절 임춘애 뺨칠 정도로 뜀을 잘 뛰었다고 한다. 이모도, 외삼촌들도 뛰었다 하면 1등이랬다. 운동회가 끝나고 집에 오면 문방구 하나 차릴 만큼의 상품이 마루에 쌓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동생들이 운동회에서 늘 꼴찌를 하는 건 아버지의 DNA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어머니의 확언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든, 40대 중반에 마라톤 대회 나가는 아들한테 운동화와 선글라스를 사주는 어머니도 드물 것이다. 황영조 선수는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를 추월할 때 고향 삼척의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나도 대회에 참가해 달리는 동안 어머니를 떠올릴 작정이다. 어릴 적 받아오지 못한 받아쓰기 공책과 손목 도장 대신, 완주 메달이라도 목에 걸어 드리리라.
체코의 유명한 마라토너 에밀 자토펙은 “눈비 오는 날이나 심한 피로가 느껴지는 날에도 나는 달린다. 자신의 의지가 문제 되지 않을 때 기적은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넘어지지 않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끝내 이겨내 기적을 일으키자고 다짐하면 전장으로 향했다.
내가 참가했던 대회는 코로나19로 3년 만에 대면으로 열렸다. 석 달 동안 틈틈이 준비한 덕에 10km 완주에 성공했다. 완주하고 나니 자신감이 상승했고, 자존감 역시 높아졌다. 내처 한 달 뒤 내 고향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또다시 출전했다. 그때도 10km를 완주했고, 기록은 이전보다 더 단축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는 ‘젬병’이라고 단정했다. 어머니 말마따나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이상 달리기로 1등을 하는 건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확고함이 있었다. “몸이 아파서 시작한 운동인데, 덕분에 건강도 찾고 좋은 성적도 거뒀다”라는 마라톤 대회 입상자들 수상 소감도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로 치부했다.
하지만 두 번의 대회를 완주하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나도 할 수 있네’라는 자신감과 더불어 건강 관리에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마라톤은 지병인 당뇨 관리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우울증과 무기력증도 많이 개선됐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한겨울을 지나면서 마라톤에 무심하면서 또다시 심신의 회의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국내 마라톤 대회 일정을 소개하는 온라인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마음 흔들리기 전에 참가신청서를 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뛸 작정이다.
대회까지 한 달 남짓. 시간 날 때마다 운동장을 달릴 계획이다. 올해도 부지런히 달릴 것이고, 해내리라. 그리고 올해 가을에는 하프 코스에도 도전하리라. 그때까지 내 두 다리와 무릎이 잘 버텨주길 바랄 뿐. 내 인생의 한구석에 마라톤이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이제 마라톤이 내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다.
일본 간사이 복지과학대의 시게모리 겐타 교수는 평소 달리기나 걷기 등 유산소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뇌 기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우리 몸은 뇌 기능을 켜는 스위치 역할을 하므로 신체 활동이 왕성한 사람은 뇌에 신선한 산소가 공급돼 뇌가 활성화되기 마련이다. 또 운동을 하면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다. (중략)그리고 운동을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 운동은 뇌의 뉴런을 길러 뇌 성능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