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한 이유

by 류재민

K 대표는 우울증을 이기는 방법으로 명상과 함께 운동을 추천했다. 명상이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을 가져다준다면, 운동은 신체적인 건강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한마디로 ‘심신 단련’을 하라는 소리였다. 운동이 건강에 좋은 거야 초등학생도 다 아는 얘기고. 무슨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과거에는 농구와 야구, 축구처럼 공을 갖고 하거나 여럿이 팀을 짜서 하는 운동을 즐겼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단체 운동보다는 혼자서 하는 운동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도 혼자 다니고, 1년 정기권을 끊은 헬스클럽도 혼자 다녔다. 겨울에는 춥다고 집에 콕 붙어있고, 날이 풀리면 바쁘다는 핑계로 빼먹고. 수영이나 헬스나 생각날 때만 찾으니 건강이 나아질 리 있을까. 아내는 돈 아깝다고 일주일에 한두 번만이라도 다니라고 채근했지만, 의지와 실천은 따로 놀았다.


그러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정말 뜬금없는 계기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면서였다. 나는 달리기에 재주가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꼴찌나 꼴찌에서 두 번째를 도맡아 했을 만큼. 1등부터 3등까지만 손목에 찍어주는 도장도 6년 동안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다.


가을마다 찾아오는 운동회가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미련 맞은 몸으로 뒤뚱거리며 맨 뒤에서 혼자 달리는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는 얼마나 안쓰럽게 바라볼까. 등수를 보고선 또 얼마나 실망할까. 어린 소년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머니는 학창 시절 달리기 시합에서 1등을 빼놓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동생들이 운동회마다 꼴등을 하는 이유는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곤 했다.


대체 운동회 때 달리기 시합은 왜 하는지 화가 날 때도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체력장’이라는 걸 하면, 턱걸이와 달리기가 제일 싫었다. 그걸 왜 입시에 반영하는지 속이 부글거렸다. 군대에서는 완전 군장 구보가 제일 고역이었다.


아픈 기억과 경험의 누적이었을까. 어른이 돼서도 뛰는 건 절대 하기 싫었다. 횡단보도 녹색 보행 신호가 깜박거리면,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암만 급해도 뛰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하거나 기차가 떠나려고 하면 미련 없이 보냈다. 다음 차는 또 올 테니까.


그러다 10km 마라톤 대회에 나가려는 목표를 세웠다. 전적으로 K 대표의 권유 때문이었다. 기초체력이 없으면 완주하기 어려울 테니 미리미리 연습하고 훈련도 해야 한다고 일렀다. 갑자기 뛰면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운동화를 새로 사고, 머리띠도 사고, 무릎 보호대도 준비했다. 첫날 약 3km를 달렸다. 27분대였다.


다음부터는 3.5km, 4km, 4.5km, 5km. 이렇게 500미터씩 늘려나갔다. 첫날과 두 번째, 세 번째까진 무척 힘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발바닥에선 불이 나는 듯했다. 장딴지에 잔뜩 알이 백여 걷기조차 힘든 날도 있었다. 다행히 한 달 만에 목표의 절반이 넘는 5.5km를 뛰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반을 넘긴 것이다. 완주에 대한 자신이 생겼다. 한참을 달리고 나면 혈당 수치도 정상적으로 떨어졌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우울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새삼 K 대표에게 고마웠다.

며칠 뒤, 우연한 계기로 마라톤 풀코스 완주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원-포인트’ 레슨을 받고 더 큰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두 가지를 조언했다. “처음부터 속도를 올리지 말라.” “중간에 쉬면, 다신 못 뛴다.”

코칭대로 속도를 최대한 줄여서 달렸다.


중간에도 속도를 올리지 않고 페이스 유지에 초점을 맞췄다. 세상에 이런 일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5.5km를 뛰고 나서도 기진하지 않았다. 다리도 멀쩡하고 발바닥에 불도 나지 않았다. 심장도 벌렁거리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맘 같아선 몇 km를 더 뛰고 싶었지만,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첫 출전은 기록보다 완주가 목표였으니.


뛰는 걸 그토록 싫어하던 내가 이렇게 변했다. 빈 트랙을 40분 넘게 혼자 달리고 있는 나를 보면 마법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사람 일은 정말 마음먹기 달렸나 보다. 10km 완주에 성공하면 자존감이 눈에 띄게 커질 것 같았다.


생애 마라톤 10km 완주는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역사(歷史)’로 기록될 것이리라. 인생도 달라지리라. 만국기 펄럭이는 운동장에서 꼴찌만 하던 뚱보 어린이가 40대 중반에 10km 마라톤을 뛸 마음을 먹을지 누가 알았겠나. 위대한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지도록 틈날 때마다 달리고 또 달렸다.

나는 2020년 5월 10일에 6.5킬로미터 달리기를 하는 동안 꽃같이 아름다웠던 시절이 전부 어디로 간 건지 궁금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나는 마법 같은 순간들을 달려왔다. 이제는 가까이 갈 수 없기에 더없이 훌륭해보이는 시간들이다. 과거는 지나갔다. 그러나 언제나 매일의 새로운 기회가 과거 위에 세워진다. *


* 베른트 하인리히, 조은영 옮김『뛰는 사람』 (윌북, 2022)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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