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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치도치상 Mar 23. 2024

아아 커피와 양 브로의 정신세계

기호, 가치관의 문제

"사장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이 아아만 찾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카페 사장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아내와 자주 찾는 카페의 사장님이신데요. 유독 사람들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하 "아아"), 추워도 "아아"만 찾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카푸치노도 있고, 카페라테도 있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있고, 플랫화이트도, 아니면 에스프레소도 있는데 굳이 "아아"만 마시는 이유가 뭘까요?

"저도 아아만 마셔요."

사장님의 대답은 반전이었습니다.

"아아는요. 간편하고요. 또, 빨리 마실 수 있잖아요."


깨달음이 왔습니다. 간편함과 빠름. 우리 문화와 너무도 잘 어울렸습니다. 간편하고, 빨리 마실 수 있으니까요.


전 우리 문화의 특징이 간편함, 편리함, 빠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만큼 편의점이 발달한 나라가 있던가요? 핸드폰 하나로 모든 게 가능한 나라가 있나요? 어떤 나라가 병원 가면 의사 선생님을 손쉽게 만날 수 있나요? 물건을 총알 배송을 해주는 나라가 있나요? AS도 확실하고 빠르게 해주는 나라 없습니다. 심지어 교통문화가 이렇게 손쉽고 편리하며 빠른 곳은 제가 알기로는 어느 나라에도 없고요. 한국만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커피/차를 마시는 방식도 문화마다 다릅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였습니다. 콩고, 우간다, 나이지리아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더랬습니다. 하루는 우간다 친구가 녹차에 우유를 타서 먹는 것이었어요. 녹차에 우유를 넣어 먹는다고? 요즘이야 녹차라테가 있으니까 이게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수 있지만요. 2008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물었습니다.

“Wait a minute, did you just put the milk in it?” (잠깐만, 녹차에 우유를 타서 마셔?)

“Yes, what’s up?” (어, 왜?)

친구는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제게 되물었습니다. 우유를 안 넣고 마시면 녹차가 쓸 텐데 (It would taste sharp without the milk) 어떻게 마시냐는 거였습니다. 저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먹는 게 당연한 거구나.


다른 미국 지방에서는 레귤러커피는 블랙커피를 말합니다. 그러나 뉴욕은 다릅니다. 식당에서 레귤러커피를 주문하면 우유를 타서 줍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유를 계속 타서 먹게 되니 저는 커피를 마시든, 홍차를 마시든, 녹차를 마시든 항상 우유를 타서 먹습니다. 우유 없이는 못 마시겠더라고요. 써서.


언젠가 티브이에서 알베르토 씨가 이탈리아 커피 문화를 소개한 걸 봤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우유를 넣은 커피(라테라든지 카푸치노)를 아침에만 마신다더군요. 점심 이후로는 에스프레소만 마신다고 하더라고요. 이탈리아에서는 우유가 “음료“가 아니라 “식사”라고 하더라고요. 점심 때 이후로는 식사를 하는데 식사를 또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영미권과는 사뭇 다른 셈이죠.


이처럼 나라마다 문화마다 커피를 마시는 방식은 다릅니다. 기호가 다른 것이고 문화가 다른 것일 뿐이죠. 기호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커피집 사장님은 이런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아아든 뜨아든 카페라테든 카푸치노든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마시고 그 시간을 음미하시면 되죠.”


최근에는 유튜브로 양 브로의 정신세계를 가끔 봅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인데 통찰력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는 얘기도 하시더라고요. 한 번은 문제를 내시더군요. 엄마와 ‘와이프’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구해야 하는가? 그러면서 ‘와이프’를 구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와이프’보단 ‘아내’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 물론 그 의미는 동의했습니다. 엄마는 내가 선택한 사람은 아니지만 ‘와이프’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선택한 사랑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문제였던가요? 흑 아니면 백이 될 수 있는 문제인가요? 전 반드시 ‘와이프’를 구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만약 그 ‘와이프’가 전처라면 엄마보다 ‘와이프’를 구할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보겠죠? 전처 역시 내가 선택했던 사람 아닌가요? 이혼 시점이 중요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내가 선택했던 사람이잖아요.


자, 더 복잡한 예시를 들어보죠. 엄마와 전처인 ‘와이프’가 빠졌고 내 옆에 전처와 낳은 아이가 함께 있다. 그러면 나는 과연 엄마를 구해야 하는가? 누구의 엄마를 구해야 하는가? 우리 엄마? 아니면 내 아이의 엄마?


예전에 ‘B급 며느리’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갈등을 여과 없이 필름에 담은 내용이었습니다. 감독은 출연한 엄마(시어머니)의 아들이자 함께 출연한 아내(며느리)의 남편이었죠.


다큐멘터리 시사회가 끝나고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감독님은 아내와 엄마의 갈등에 중재역할을 하지 않았나요? 그 대신 촬영을 하신 건가요?”

 그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신도 초반에는 중재를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그러나 중재를 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고. 아내와 엄마 사이의 골이 더 깊어졌다고.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고. 그게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최선의 노력임을 발견했다고요.


저는 양 브로 선생님들보다 그 감독님이 더 솔직한 대답을 한 것 같더라고요. 인간관계의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무엇이 옳다 그르다고 쉽게 얘기할 수 없죠. 사람들마다 가치관도 다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와이프’를 구하는 것이 옳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가치관은 기호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커피를 어떻게 마실 것인가가 개인의 기호, 문화에 달려있듯이 가치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가치관이 옳고 저 가치관은 틀리다 (흑백논리)라고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반드시 ‘와이프’를 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도 흑백논리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가치관에 맞춰 구하면 되는 거죠. 그리고 가치관의 문제를 흑백의 문제로 치환하는 데(누구를 구해야 하는지 극단적인 예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바람직해 보이진 않아요.


아아와 카푸치노가 물에 빠지면 반드시 아아를 구해야 하는 걸까요? 카푸치노를 구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여러분은 어떠시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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