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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Aug 11. 2021

갑자기 어두워졌다

색연필 그림일기


저물기 전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휴일에야 비교적 여유 있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기에 눕고 싶은 마음을 눕혀놓고 신발을 신는다. 햇살이 아직 뜨겁다. 매미들이 일제히 울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지고 또 일제히 운다. 숲 전체가 거대한 매미다.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숲이 운. 그 소리가 너무 맹렬해 처절하게 들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매미에게 산다는 것은 처절한 것인가 보다. 나라고 별다를까...... 길에 들어선다.


9킬로만 걷기로 한다. 머릿속에 이토록 많은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그러나 그 많은 생각들은 비워지고 길에 집중한다. 길은 생각을 비우게 하여 오감이 살아나는 공간이다. 생각이 빠져나간 자리엔 산과 들의 녹음과 길의 냄새, 벌레들의 움직임과 소리, 바람의 움직임과 구름, 물소리들로 채워진다. 벼는 이삭이 패기 시작했다. 여름 늦더위에 벼는 비로소 익기 시작한다. 밥이 되고 살림이 되고 생이 될 저 쌀을 위해 오늘도 이렇게 걷지 않느냐. 이 무더위를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길 바깥쪽 차도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도 느리게 들려온다.


반환점을 돌아서는데 갑자기 어두워졌다. 무례한 사람처럼 바람이 이리저리 불며 주변을 흔들었다. 바람에서 비 냄새가 났다. 풀 숲에 숨어 있던 백로 한 마리가 흰 날개를 펴고 황급히 숲으로 사라졌다. 산등성이의 실루엣이 어둑어둑하다. 맑았던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시커먼 먹장구름이 머리 위를 덮었다. 구름은 커다랗게 한데 뭉쳐지며 손에 잡힐 듯 낮게 깔리더니 후두득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주변의 비닐하우스 농장 때문에 빗소리가 마치 폭포 소리같이 들린다. 길엔 사람 하나 없다. 조금 무섭다.



길바닥의 흙이 튀며 운동화와 양말이 지저분해졌다. 온 사방에 흩어지는 흙냄새, 비 냄새, 풀숲 냄새, 개울물 냄새. 뛰어갈까? 생각해보니 차를 두고 온 곳까지 가려면 30분을 더 걸어야 한다. 그냥 비를 맞기로 한다. 땀을 많이 흘려서 차라리 비가 더 쏟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빗줄기세차게 굵어졌다.


커다란 벚나무 밑에 오니 그곳은 비가 들이치지 않아 뽀송했다. 벚나무 밑에 잠시 서서 대견한 나무 기둥을 만져본다. 따뜻하다! 나무 기둥이 따뜻하다니..... 공연히 마음이 뭉클해진다. 갱년기 탓이다. 걸핏하면 뭉클해지고 말을 더듬고 옹졸해진다. 걸핏하면 욱하는 것도, 별 일 아닌데 눈물이 나는 것도 다 갱년기 탓이라고 탓한다. 나이는 먹으면서 마음은 철이 들지 않는다. 이 마음을 어찌할까. 몸통이 따뜻한 벚나무에게 묻고 싶다. 또 생각이 쌓이는군. 나무와 함께 노래 한 곡을 골라 듣는다.

 '바람이 부네요~ 춥진 않은가요~ 바-암 깊어 문득 그대 얼굴이 떠올라~'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비 냄새가 난다. 


잠시 후 비가 그치고 길은 다시 환해졌다. 벚나무 기둥의 따뜻함이 자꾸 생각난다. 멀어지는 나무를 돌아보는데 해가 넘어가려고 한다. 다음 길에 나설 땐 저 벚나무를 찾아가야지. 그 나무는 이제 길에 늘어선 그저 나무가 아니다. 길은 금세 어두워졌지만 벚나무 기둥의 따뜻함 때문에 무서움이 가셨다. 남은 비가 흩뿌려도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벚나무 기둥의 따뜻함을 만진 손으로 얼굴과 목을 쓸어본다. 팔이 닿을 수 있다면 등도 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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