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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향하여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나뭇가지 끝이 투명해지고 있다.

아침에 차 마실 때 본 하늘보다

점심 먹을 때 본 하늘이 더 멀어졌다.

길은 더 차분해지고

저마다의 색과 모양으로 열매를 맺고 있다.

어떤 것은 초록으로, 어떤 것은 까맣고 붉은 혹은 갈색으로.

밤송이들이 눈에 띌 정도로 커졌고

대추나무는 메추리알 크기의 알들을 주렁주렁 달았다.

감은 보기만 해도 떫은 연둣빛이다.


매미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까,

풀벌레들이 밤낮으로 울어댄다.

생각이 많아 고단한 날은 풀벌레들이 밉다.

자주 깊은 새벽에 일어나 창을 닫는다.


나 대신 우는 거니? 너무 울지 마라.

내가 오늘 살아있다고 생의 끝자락에 닿아있지 않은 건 아니야.

나는 또 어쩌지 못하고 견디고 있거든.

울어봐야 소용이 없단다. 비웃음만 살뿐이지.

이놈의 현실은 그 정체대로 현실적이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런 것을 얻으려니 힘들고 구차하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이니


매미야, 여치야, 찌르레기야,

내년 무성한 녹음과 함께 다시 오렴.

비웃음이 두려워 울지도 못하는 나 대신 울어주고

이 지구도 변함없이 지켜다오.

내 맘이 조금은 너그러워져

너희 울음소리 들어줄테니.


초록으로 한 가지 색이던 앞산에도

실수로 노란 물감 한 방울 떨어졌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햇살 속에 다시 비 오고

그 와중에 어느새!

이런, 길가 벚나무들 붉은빛이다.

드문드문 뚫린 큰 나무 몸통 사이를

바람이 지나다니며 후드득, 잎을 떨군다.

내 몸이 공연히 떨렸다.



지난여름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나.

내일도

가을이 와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바람은 불고 하늘이 파랗게 멀어져도

나는 견뎌야 할 것을....



떨굴 것은 떨구고 열매 맺으연 좋겠다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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