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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캠핑장 구타 유발 미수 사건

참을 인 세 번으로 구사일생.

by 재원

여느 가장들이 다 그렇듯 나도 처음에는 캠핑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모닥불 앞에서 불멍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며 육즙이 흐르는 꼬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무는 그런 낭만적인 모습을 꿈꿨다. 캠린이었지만, 다행히 캠핑의 전문가인 형님이 있어서 꼽사리 껴서 따라다녔고, 장비를 하나, 둘 장만해서 드디어 독립할 수 있었다.

처음 도전한 곳은 상암동의 노을 캠핑장이었다. 하늘공원에 놀러 갔다가 그 풍광에 반해서, 캠핑을 온다면 꼭 노을 캠핑장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름부터 멋지지 않은가? 노을 캠핑장이라니? 높은 곳에서 한강 강변의 노을과 야경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노을 캠핑장은 접근성이 좋지 않다. 차로 캠핑장까지 바로 갈 수 없고,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에 맹꽁이 버스에 짐을 싣고 한참 올라가서 캠핑 사이트에 도착한다.

가는 길이 쉽지 않았지만 노을 캠핑장은 큰 만족감을 주었다. 아이와 함께 놀 수 있는 공간도 많고, 산책을 하며 한강변을 보는 것도 좋았다. 다만, 그때가 가을쯤이었는데 밤에 부는 강바람에 유리 인간인 나는 약간의 감기 기운을 얻었고, 두통기가 점점 심해졌었다. 하지만, 두통기가 있다고 캠핑장에서 술을 마시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근성으로 찬바람에 맥주를 열심히 마셨고, 두통은 좀 더 심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감기 기운과 숙취의 더블 콤보 때문에 컨디션이 크게 좋지 않았다.

전날 먹었던 흔적들을 겨우겨우 치우고, 텐트를 철거했다. 보통 캠핑장은 바로 옆에 주차된 차에 짐을 싣지만 이곳은 다르다. 캐리어를 이용해서 맹꽁이 버스 승차장까지 짐을 옮기고,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차 한 대에 한 팀씩 움직이기 때문에 꽤 오래 기다렸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 집 운전은 잘하는 사람이 한다. 아내가.

그래서, 아내가 차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내가 굉장히 당황하더니 말한다.

“여보, 차키가 안 보여”

?!?!! 잠시 차키의 행방에 따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Plan A : 짐 속에 있다.
: 주차장 한가운데서 짐을 다시 풀고 차키를 찾아야 한다.
Plan B : 캠핑장 쪽에 흘렸다.
: 버스를 한참 기다렸다가 올라가서, 차키를 찾은 후에 한참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캠핑장 휴일이었다. 하행 맹꽁이는 있지만 상행 맹꽁이는 없다.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가자 마음 깊은 곳에서 갑자기 화가 솟구쳐 오르는 걸 느꼈다. 평소완 다르게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지 분노 게이지가 명치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고 아내에게 말하였다.

“혹시 주머니에 없으면 가방 같은 곳에 있지 않을까?”

아내가 가방을 열심히 뒤졌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가방에는 키가 없고, 난 어제 여보한테 차키를 준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가방에도 없다니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 탓을 하다니. 운전을 하지도 않는 내가 차키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금방이라도 아내를 힐난하는 단어를 쏟아내고 싶었지만, 일부러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화를 내서 무엇 하나 하는 마음으로 참았다. 서로 기분만 안 좋아지지 닫혀있던 차가 열리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혹시 다른 곳에 둔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잘 찾아봐.”

아내도 나에게 열쇠를 준 기억에 대한 확신이 없는지 다시 열심히 찾았지만, 여전히 차키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보한테 진짜 없어? 난 여보한테 준거 같은데?”

진짜 없으면 아까 정해놓은 플랜대로 실행해야 하는데, 몸도 안 좋은데 움직이려니 짜증도 나고, 자꾸 나한테 잘못을 미루는 것 같아서 더 화가 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입에서 방언이 터지기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고 있던 점퍼의 안주머니를 뒤져봤다.

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뭔가 작고 딱딱한 물건이 만져지는 것이다. 머쓱하게 내 주머니에서 나온 차키를 아내에게 건네주며, 나는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진짜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만약 내가 불같이 화를 낸 후 주머니에서 차키를 찾았다? 너무 무서운 상황이 펼쳐졌을 거 같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지 않은가? 참을 인 세 번으로 아내의 살인을 막은 이 상황이 정말 다행이었다.


역시, 옛 성현의 말씀은 흘려들을 게 없다.

인내의 승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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