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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나날들

by 재원

살면서 보면, 화를 내기 애매한 상황들이 있다. 이상하게 먹이는 거 같은데, 먹은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상황들?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기술자들이 우리 집에도 있다. 피해사례를 몇 가지 가지고 왔다.


사례 1.

평소에 패션센스와 손재주가 없어서, 옷 입기, 머리 만지기 등을 아내에게 의지하는데, 아내는 강하게 키우고 싶은 건지, 귀찮은 건지 대부분 별다른 피드백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주로 옷 서랍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집어 입는데, 그 결과물이 남들 보여주기 부끄러울 때는 입은 옷을 수정해 주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만져놓은 헤어스타일을 한숨 한번 쉬고 다시 만져주기도 한다.

그날도 중요한 자리에 가는 날이라 아내가 머리를 봐준다고 하여, 나는 신나서 욕조에 얌전히 걸터앉아 있었다. 아내는 내 앞에 서서 손에 왁스를 비비더니 미용실 원장님 같은 솜씨로 머리를 만져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마음대로 잘 안되는지 자꾸 ‘아~ 마음에 안 드는데~’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머리가 잘 안 만져지는 줄 알고 그냥 있었는데, 자꾸 면전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니 그게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앞에 앉은 사람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혹시 돌려 까는 거냐고 했더니. 마구 웃으며 아니라고 한다.

아니라고 했으면 그다음에는 좀 자제해야 하는 게 아닐까? 뭔가 힌트를 얻었는지, 더 자주 크고, 강하게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 면전에서 당당하게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수 있는 사람. 당당한 앞담화.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

주어가 없잖아.


사례 2.

얼마 전에 핸드폰을 교체하였다. 엘지 폰에서 삼성폰으로 바꿨더니 연락처라던가, 문자, 카톡 등을 옮기기가 힘들었다. 업무상 자료들이 그대로 있으면 좋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 주말에 날을 잡고 일일이 옮겨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혼자 검색을 해보더니 어떤 앱을 깔면 된다고 한다.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자 답답했던지 본인이 알아서 내 새 핸드폰과 구 핸드폰에 앱을 깔고 자료를 옮겼다. 어쩐지 편한 것 같아 앞으로도 자주 버벅거려야겠다고 다짐하는 와중에 아내가 내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어 보더니 새 핸드폰 카메라가 좋다고 사진이 잘 나온다고 하였다.

찍힌 결과물을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래서, 항상 셀카 찍기가 두려운 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 앱을 켰다. 셀카 모드로 돌리니 화면에는 초췌한 노숙자 같은 아저씨가 나타나고 있었다. 차마 촬영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조용히 앱을 껐다.

“사진 잘 나온다며?” 아내에게 따지니 당당하게 말한다. “난 잘 나오던데, 왜 그럴까?”

왜 그럴까? 그 이유 잘 알면서 왜 반문하나? 난 답을 알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사례 3.

연우랑 같이 티브이를 보다가, 아내가 고3 때 좋아했던 남자애랑 잘 안된 연애 얘기를 꺼냈다. 연우가 엄마 인기 없었냐고 물어보니, 아니라고 그땐 남자가 줄을 설 때라고 하면서 참 이상한 일이었다고 하였다.

뭐라고 리액션을 해줘야 하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우가 아빠도 줄 섰냐고 물어본다.

‘아빠도 줄을 섰지.’하고 대답하니 둘이 막 웃더니 말도 안 된다며 대화를 끝내버렸다.

내가 줄을 섰다고 말하며 빵 터뜨리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비웃음만 당하고 끝나버렸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데 말이다.

아니, 그보다 줄 섰다는 대답 듣고, 웃을 거면 처음부터 묻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답은 정해져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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