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람이 Apr 28. 2021

나에겐 나이트 워처가 있다

나에겐 나이트 워처(Night’s watcher:밤의 파수꾼)가 있다


“다음부턴 제발 설탕 불지 말자. 너무 고집부리지 말고…”


남편은 눈이 퀭했다. 뭔가 비장하고 간절한 말투에서 심각한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설탕을 불어?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게 해 봐요”


“어제 뷔페 음식 먹었다고 인슐린 양을 너무 늘인 거 아냐? 운동이 심했거나, 건강식품을 과하게 먹은  같아. 어제 새벽 혈당이 38이었어. 완전 마비상태였어. 말귀도 못 알아먹더라고.. .


“그 그래?뷔페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인슐린이랑 운동량을 조금씩 늘렸더니…” 민망하고 미안스러워서 말끝이 흐려졌다.


“ 냉장고에 두유도 없었어. 내가 급하게 한 숟가락 설탕을 먹이려고 하니까, 네가 한 숨을 푹 쉬면서,

숟가락 설탕을 다 날려 버렸네….  다시 물에다 설탕을 녹여 왔는데 컵에 든 건 왜 또 거부하는 건지…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는지 아냐? 나도 손 떨리게, 뛰어다니고. 반쯤 흘리고 마셔서 혈당이 올라오지 않아 몇 번씩 더 먹이고 난리였다” 애타는 눈빛, 생동감 나는 애정 어린 표현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에고 ~고마워. 참~ 맞추기 힘드네." 

 말은 그랬지만, 아무리 떠올려봐도 아무 기억이 없었다. 밤 사이 피곤한 상태의 저혈당은 나에게 아무런 기억을 남기지 않았다. 남편의 얘기가 다 거짓말 같았다. 그런데 숟가락에 놓였던 설탕을 불어쟀겼다는 말에 어처구니없이 웃음이  터졌다.


“훅~ 불어 버렸다고? 허허허. 왜 이리 웃기지? 허허허허 허~”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이 터졌다.



사진 : 자람이


 고비 때마다 웅얼거렸다. '나는 해답을 찾을 거다. 늘 그래 왔듯이...'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인터스텔라 명대사를 읊어댔다. 그렇기에 난 조금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탄탄대로의 삶을 살지 못했다. 남편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스펙터클 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힘든 경험 덕분인지 다른 사람들의 얘기가,  ‘왜 그랬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 저절로 이해가 되곤 했다. 머리로 하는 이해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자주 혼자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러면서 괜찮아지는 거야’라는 말을, 수업  받는 학생들에게도,나에게도 자주 했다.

 남편이 고마웠다.  의연한 척 웃으면서 남편의 말을 다시 받았다.


“지난 새벽에 고생했구나!(약간 감탄의 얼굴) 아직도 당황한 기색이 남았네. 완전 저혈당 쇼크 직전이었군.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래서 남편은 새벽 4시쯤에 기상 알람을 설정했다. 나의 저혈당을 확인하는 시간으로 정했다고 했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잠이 깨면 반사적으로 내 손부터 잡아 보았다. 잠이 깰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저혈당인지 아닌지를 체크한다고 했다.

 나는 자고 일어나면 배시시 웃으며,

"저혈당은?" 그렇게 아침을 열기도 했다.


300마일 지평선 따라 세워진 장벽 위. 최전방 수비대,

호시탐탐 장벽을 넘어오려는 화이트 워커(백귀) 와이드 링(좀비) 공습에 맞서는 나이트 워처. 강추위 어둠 속에 뿜 뿜, 간지 나는 ‘왕좌의 게임의 존 스노’가 떠오르는 단어일 것이다. 이곳 남자들은 살던 곳에서 아웃사이더이거나 범죄자들이었지만, 이곳에서 선망받는 남자로 새로 태어나기도 했다. 마치 남자들이 군대 갔다 오면 달라지는 것처럼. 백귀나 좀비 떼와 맞서 혜성처럼 나타난 구원투수들이었다. 그런 나이트워처가 우리 집에서 탄생하게 되리라고는 이 미드를 볼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다.


10년 전 일이다. 난 1년 동안 학원을 정상으로 꾸려나가기 위해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선, 시스템을 구축하는 1년을 목표로 일에 올인하고 있었다. 계절마다 시험 때마다 사이클을 주기로 해야 하는 일들이 쌓여갔다.  공문 만들기, 교재 연구, 시험대비, 특강 교재 만들기, 학부모 참관 수업 기획, 홍보행사나 마케팅 대응, 상담, 학생관리 등으로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해보고 있었다. 첫해에는 모든 일이 처음이라서 가족행사 많은 5월은 생각이 복잡했다. 양가 어른들 챙기는 것과 한참 사춘기를 넘기고 있는 딸, 아들, 더불어 해보지도 않은 소득세 신고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런데 수업하다가도 자주 소변을 보고 싶었다. 마른 입 때문에 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갈증이 확 해소가 되지 않았다. 피로감, 불면증 때문에 계속 몸이 무거웠는데 결정적으로 이석증때문에 구토를 계속해서 병원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의사는 이런 저런 검사 결과를 보고, 당뇨가 굉장히 심했는데 몰랐느냐고 했다. 당시 당뇨 수치가 480(120 이내 정상)이어서 며칠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동안 불규칙한 식사에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당장은 입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일단 약을 먹으면서 일주일 경과를 보고 다시 결정하자고 하셨다.

  당시,모든 일이 새로운 시도여서 긴장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막연히 피곤이 쌓여서 떡실신하듯 잠들고,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어서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먹었던 때였다. 힘들어도 참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씻고 몸을 누이면 뻗었다. 그렇게 몸이 힘들어 꼼짝도 못 할 것 같은데, 덮쳐오는 세월의 무게감이 더욱 나를 옥좨왔다. 마음 한 켠 가둬 두었던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몸은 꿈쩍도 않는데 한없이 두렵고 서글픈 빈 구석이 생겼다. '암이 아닌 것을 감사해야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을 놓을 수는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감당할 것이 너무 많아서 막막했다. 그럴 때면 슬그머니 잠들어 있는 아이들 옆에 누웠다. 손을 잡고 한없이 꼼지락꼼지락 거리면서 살을 부대꼈다. 주물럭거리다가 아이 잠이 깰까 봐 조금 쉬었다가 다시 꼼지락꼼지락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퍽퍽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아이 뺨에 뽀뽀를 하고 나서 평정심으로 돌아오곤 했다.


 검사 결과로 당뇨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예기치 못한 당뇨 판정은 건강을 위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절제 있게 시간에 맞춰 당뇨약을 먹기 위해 식사 시간을 맞췄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고혈당이 문제라기보다는 저혈당이 문제였다. 약으로만 조절이 안돼서 인슐린 주사를 아침저녁으로 주사했다. 외식을 먹게 되면 인슐린양을 1-2를 늘였고, 평소보다 활동량이나 운동량이 많을 때는 인슐린을 줄였다. 생각보다 많이 먹으면 인슐린을 조금 더 맞았다가 갑자기 저혈당이 오기도 했다. 낮에 저혈당이 오면 그럭저럭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사탕을 한 스푼 떠먹거나 두유, 주스를 마셔 회복시켰다. 가방에는 늘 설탕이나 사탕 같은 저혈당을 예비한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자다가 저혈당이 생기면 비상상황이 되었다. 친구 생일이어서 술을 마셨는데 그 새벽에 저혈당이 와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의식이 가물가물 했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니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듯 싶었다. 그래서 술을 거의 끊다시피 하게 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금지 식품들이 점점 늘어났다. 일정 패턴으로 잘 유지해오다가 코로나로 학원을 닫게 되었던 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졌다. 하루 종일 수업으로 꽉 채워졌을 때는 사이사이 먹던 음식이나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수업이 없어지니까 낮에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인슐린 양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남편이 퀭한 눈을 하고선 일어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다음부턴 제발 설탕 불지 말자. 너무 고집 부리지 말고…”


어쩌면 남편은 극한의 밤을 매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하는 일에 몰입하는 과다한 열정의 아내 때문에 남편은 밤사이 나이트 워쳐가 되었다. 남편은 나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전에 나의 저녁 인슐린 주사 양을 물었다. 내가 숫자를 불러주면서 주사를 맞는 것을 보고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자기 직전에 혈당을 재고 잠이 들었다.

 나이트워처는 내가 자고 있는 사이, 저혈당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다고 했다. 이마를 짚어 보고 식은땀이 있는지, 손을 잡아보아 힘이 느껴지는지, 코를 규칙적으로 고는지 등으로 저혈당을 체크한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무조건 머리맡에 혈당 체크 침을 손가락에 찔렀다. 나는 그러는 줄도 모르고 잠이 들어 깨지 않는다고 했다. 새벽 4-5시쯤에, 남편이 나의 상태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말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었다.

 지난밤 나의 나이트워처는, 내가 편히 잠든 중에도 나를 지켜냈다. 나를 지켜주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주어진 내 삶을 더욱 충실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당뇨관리를 통해 나는 더 건강해졌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 사랑의 가치에 걸맞은 귀중한 존재가 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의 아픔이나 눈물이 가르쳐준 것들은 참으로 고귀한 것들이었다.

 생명에 대한 체감때문인지,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다. 저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생명을 연장해가는 신비로운 생명의 연결고리에 눈 맞추게 되었다. 그리고 좋은 것 이면에 안고 있는 그림자에도 순응하게 되었다. 그래서 눈물도 많아졌다. 내 안에 잠든 것들을 일깨우니 깨어난 것들이 나의 영혼을 채워 주기도 했다. 그러자 두려웠던 것들도 희미해져 갔다. 남편과도 끈끈한 유대가 생겼다. 누가 보든, 누가 뭐라든, 깨달아진 영혼들과의 눈맞춤은 나를 변화시켰다. 아이들, 보이는 나무,꽃, 등등 그 어떤 생명하고든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니, 무생물도 생물처럼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래서 자꾸 시를 쓰게 된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이 순간이 선물 받은 축복의 시간이 되고 싶으면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의 시간’이 되어 주면 된다고 여겼다.


사진 : 자람이



 힘든 현실 속에서 불면증, 우울함, 과한 피로감, 건망증, 과도하게 예민해지던 삶의 횡포에서 조금씩 유연해졌다. 그러자 우리 부부의 의사소통은 오감을 넘어서는 새로운 감각이 생겼다.

너뿐이라 착각하게 하는, 내일은 다를 거라고 암시를 거는, 내 방식대로 업그레이드하면 된다고 열망하며 상대를 믿어주는 감각이었다. 그건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우리 부부의 사랑 표현의 원칙에서 생긴 감각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유머와 웃음을 즐기려는 시도들, 무작정 손을 잡고 얘기를 하거나 길을 다니는, 무심한 척 ‘사랑 한 꼬집’ 넣는 제스처를 과용하면서 생긴, 감각이었다. 그 감각으로 남편은 나의 저혈당을 금방 알아채는 거였다.

 사실 웬수 같은 남편일 때도 있었지만, 고통의 시간을 함께 버티며 웃음을 건넬 수 있으면서 결혼을 한 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기진맥진한 인내의 시간들을 위로의 마음으로 함께 하면서 성숙해져 온 시간이었다. 특히 내 건강에 대해 나이트워처가 되어 주는 남편 덕에 나는 조금씩 '업글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미우나 고우나 남편, 아내로 살기로 하였으니 <어쩌구니 없이>라도 하루 웃고 살려고 했고, 감사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안 하던 행동이나, 말도 안 되는 농담도 주고받는다. 그래도 어쩌겠나. 가슴 뻑적지근하게 웃을 수밖에.

빵 터지게 웃다보면 정이 새록새록 쌓였다.

 실컷 웃다가 보면 왜 눈가가 젖어 있는 건지 참 알 수가 없다.






사진 : 자람이

커버이미지 :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도토리묵 만드는 할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