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의 지적 유희의 결정판, 종의 기원
신은 그 자신의 모습을 본떠 우리를 만드셨다. 신이 수많은 모델 중에서 어떤 모델을 닮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종의 기원>은 아주 도발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로봇을 수직계열로 나열시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부순다. 인간이 사라진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읽는 내내 즐거움의 향연이었다. 인간이 사라지고 로봇은 자신의 존재의 기원을 궁금해한다. 그래서 남아있는 기억과 문헌에 기대어 '자신들만의 신'을 상상하게 된다. 김보영 작가는 아이작 아시모프에 대한 오마주로 로봇 공학 3 원칙을 슬쩍 책 속에 녹여 넣는다. 이러한 세심함이 SF를 읽는 한명의 독자로 참 즐거웠다.
로봇은 자신들을 이루는 무기물을 생명과 동치 시킨다. 자신들을 구성하는 무기물 이외의 유기물은 당연히 터부시 되는 것이다. 유기화학은 마치 중세의 연금술처럼 취급되며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레 인식하는 복제와 분열은 소설 속에선 사이비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모든 신앙은 상징이며 우화야. 문학과 예술의 영역일세. 그 어디에도 과학은 존재하지 않아. 자네가 예술도 일종의 과학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종의 기원>에서 로봇들은 진화론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로봇이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터부시 된다. 소설의 주요 스토리가 언급되는 시기는 이미 로봇에 대한 창조론과 진화론의 격돌에서 진화론이 KO승을 이미 거 둔 후다.
"생명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하고,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야 하며, 칩을 갖고 있어야 하고, 공장에서 만들어져야 하네. 자네의 유기물이 그중 어느 조건에 부합하지?"
김보영식 유머는 너무나 유쾌하고 생기 발랄하다. 현대의 창조론과 진화론을 이러한 형태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접근법 자체가 너무 신선하다. 김보영 작가에게 동조하느냐 마느냐는 그 후의 이슈다. SF의 최대의 장점이 다르게 보기, 비틀어 보기 아니겠는가? SF를 즐겨하는 독자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한번 말고 3-4번 정도는 읽어봐야 '김보영식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보영 작가의 <종의 기원>은 사실 10번 넘게 읽었다. 그동안 이 중단편에 대해 글을 적고 싶었지만 한 번만 더 읽고 쓰자라며 미루어왔다. 사실 지금도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제대로 늘어놓지 못해 너무 아쉬운 상황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받은 감상을 전하려면 <종의 기원>을 통째로 타이핑 쳐야 할 것이다. 책 속에서 가장 곱씹었던 문장은 아래와 같다.
"공장을 만든 신에 관하여
공장이 자연적으로 진화한 초생명체라는 일반론에도 불구하고, 공장을 만드는 신에 관한 신화는 전 세계에 걸쳐 전승되어 온다. (중략) 또는 그저 신들이 더 이상 불사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자신들의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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