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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y 26. 2022

태극기는 역관 이응준이 만들었다.

과연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 할 까?


KBS News 조미수교에 사용했던 태극기

나는 미국 시민이다. 그렇지만 태극기를 볼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눈물이 고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미국에  산 지 벌써 48년이 되었지만 정작 내 나라 국기인 성조기를 보면 무감각이다. 


미국 국기는 “Stars and Stripes”라고 한다. 별과 줄이다. 그래서 성조기라고 한다. 별은 50개 주를 

줄은 건국당시의 13개 주를 상징 한다. 누구나 다 이해 할 수 있는 국기이다. 


태극기는 음양을 뜻하는 태극이 가운데 있고 하늘, 물, 불, 땅(건곤일척)을 상징하는 검은 색 작대기가 사각형의 네 모서리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별로 애착이 없는 성조기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내 가슴을 치는 태극기는 속 시원하게 이해 하지 못한다. 왜 그럴 까?


나는 해방 될 무렵에 한국에서 나서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태극기는 조선시대에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국기이다. 학교에서 유교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다. 태극기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와 닿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렇다 치고 태극기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졌을 까? 만들어진 과정 또한 대한민국 보다는 조선을 상징하고 있음을 증명 해 주고 있다. 


태극기와 미국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882년 5월22일 조미통상조약 체결 당시에 역관 이응준이 도안한 태극기가 성조기와 함께 사용 되었다. 따라서 이응준이 처음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설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 하다. 


얼마전 까지 만 해도 1882년8월 박영효가 임오군란 사죄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에 가던 중 배안에서 급하게 태극기를 만들어 일본과의 회담에 사용 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태극기의 유래 이다. 


그러나 1882년5월22일 조미통상조약 당시에 사용된 태극기의 도안이 최근에 발견되어 박영효 태극기 최초 도안 설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임이 증명 되었다. 박영효가 배안에서 태극기를 만들기 4개월 전에 이미 똑같은 태극기를 사용 했 슴이 입증 되었기 때문이다. 이 태극기 도안은 Flags of Maritime Nations(역사 박물관 소장)라는 책과 미국 의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조미 수교 당시 미국 대표 였던 R. Shufeldt 문서에 있다. 


조선 최초의 태극기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미국이 조선에 서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노력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청의 황룡기와 비슷한 국기를 원했고 미국은 조선을 청의 영향력에서 떼어 낼려고 독자적인 국기를 만들 것을 조선 대표 신헌과 김홍집에게 권 했다.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인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만들 것을 명 했다. 이응준은 미국 함정 스와타라 호에서 1882년5월14일에서 5월22일 사이에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태극기는 1882년5월22일 조미통상조약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나란히 계양 되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당시 청나라 대표였던 마건충이 김홍집에게 태극을 가운데 그리고 팔궤를 주위에 그려 넣을 것을 제안 했다고 하여 그가 태극기 초안을 잡아 준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 출처는 김홍집과 마건충의 대화를 기록 한 “청국문답”으로 되어 있다. (한국 근대사 산책 1권; 태극기의 국기 제정, 강준만 저) 그러나 원본을 자세히 해석해 보면 사실이 아니다.


https://pgr21.com/freedom/89332

○ 마건충이 이르기를,

“지금 한 가지 일을 알리니 귀 국은 먼 곳의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국기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번 이응준(李應浚)이 국기의 형식을 소매에 넣고 도착하였는데 일본과 귀 국의 국기 형식이 서로 섞였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지난번에 황(黄) 참찬(參贊)이 귀 국하여 당연히 중국의 용기(龍旗)를 사용해야 한다고 저에게 보여 주었으니 역시 편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 마건충이 이르기를,

“내가 생각건대 귀 국의 기는 백색 바탕에 푸른 구름과 붉은 용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직 용은 네 개의 손톱을 사용한 것으로 구획을 암시하였으니 어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네 개의 손톱과 다섯 개의 손톱의 (차이만) 있을 따름입니다. 푸른 구름이라는 것 역시 구름을 취하느냐 용을 따르느냐로 군신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이유로 바탕을 백색을 사용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마건충은 이응준의 도안을 일장기와 비슷하니 마음에 안든 다고 하면서 푸른 구름과 붉은 용을 흰바탕에 그려 넣을 것을 요구 하고 있다. 


그러면 당시에 청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 지 알아 보자.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1/12/MEANH7FET5FJTPTBJ2JMZQTSYI/


“아홉 번 머리 조아린 신헌과 김굉집

1882년 5월 8일 위원(威遠), 양위(揚威), 진해(鎭海) 3척 군함에 분승한 청나라 관리 마건충과 제독 정여창이 인천부 호도(虎島)에 도착했다. 나흘 뒤 아메리카합중국 전권위원 해군대장 슈펠트가 군함 스와타라를 이끌고 인천부 호도에 도착했다.(‘고종시대사’ 2집 1882년 3월 21, 25일) 소식을 들은 조선 정부는 서둘러 청나라 사람들이 묵을 객관을 국비로 마련해줬다.(1882년 3월 15일 ‘고종실록’) 마건충은 프랑스 유학파 법학박사였고 정여창은 영국으로부터 양위호를 인수해 끌고 온 장교였다. 두 사람은 두 달 뒤 벌어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간 주역이었다.


조선측 전권대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인 신헌(申櫶)이 임명됐다. 부관(副官)은 김굉집(金宏集)이었다. 본명은 김홍집(金弘集)이다. 5월 13일 조선 선발대가 위원호로 와서 내일 ‘진알(晉謁: 알현)’에 대해 설명했다. 마건충이 말했다. “아래 나라(下國·하국) 대신은 대신이라 하지 말고 대관(大官)이라고 하라.”(마건충, 앞 책, p202)


다음 날 오전 11시 조금 지나서 정사 신헌과 부사 김굉집이 군함에 올랐다. 이들은 ‘큰 기가 휘날리고 거대한 천막 아래 군용 장막이 설치된 청 선박 네 척에 올라 위원호로 향했다. 대취타가 울려 퍼지며 병사들을 호령하는데, 실로 장엄하였다.’(신헌, ‘미국통상실기(美國通商實記)’)


신헌에게는 석희(奭熙)와 덕균(德均)이라는 동행이 있었는데, 각각 아들과 손자였다. 승선 후 이들은 통역을 통해 “배신(陪臣·황제 아래 제후의 신하) 모모가 등선했다”고 전한 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치르며 국왕을 대신해 공손히 황태후와 황상 안부를 물었다. 마건충과 정여창은 의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제야 이들과 상견례를 치렀다.(마건충, 앞 책, p203) ‘미국통상실기(美國通商實記)’에는 신헌이 아들·손자를 데려간 사실과 고두례를 행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또 신헌은 마건충이 지시한 대로 본인과 김홍집을 ‘대신(大臣)’이 아닌 ‘대관(大官)’으로 기록했다.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역사; 조미조약 체결전 조선대표는 청 황실에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


미국은 1871년 5월 강화도 앞에서 함포 시위를 하여 조선의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대원군이 무력으로 대응 하여 수교조약을 맺는 데 실패 했다. 미국이 아시아로 진출 하는 데 조선과의 수교가 필요하고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을 견제 할 수 있다고 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결정하고, 1880년 슈펠트 제독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보냈다. 그는 일본외상 이오우에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에 도착 했다. 동래부사 심동신에게 통상을 요구 했다. 심동신은 조선은 미국과 마음과 뜻이 통하지 않고 일본을 중재로 하는 교섭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거절 했다. 


청나라의 외교 책임자였던 이홍장은 이소식을 듣고 슈펠트를 텐진으로 초청하여 둘은 조선과 미국의 수교 조약 에 관하여 조선 없이 협의 했다. 이홍장은 “조선은 본래부터 청나라의 속국이다”

라는 조항을 명문화 할 것을 주장 했으나 슈펠트는 “조선이 조공국이기는 하나 정교금령은 자주자행하고 있는 엄연한 자주독립국가”라는 사실을 강조 하며 이에 반대 했다. 결국 별도 조회문 에서 속국론을 밝히기로 하고 청과 미국사이에 조선통상수교조약에 관한 합의를 보았다. 신헌과 김홍집은 이홍장과 슈펠트의 합의문 그대로 만든 문서에 서명 했다.(조미조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합의문에는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조항이 없지만 사실상 속국이었다. 미국이 조선을 청의 속국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조선을 청의 영향력 에서 벗어나게 해야 미국이 조선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한국사람들은 “우리것”하면 “조선것”이라고 아무생각 없이 받아 들인다. 그러나 조선은 우리민족이 자랑할 만한 역사를 만들 지 못 했다. 조선 500년은 중국에 곁 붙어 살던 세월이었다. 

대국 명나라와 청나라가 망하자 조선도 망 했다. 조선의 종말은 한민족을 나라없는 민족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500년 동안에 한민족 5000년 역사를 끝장 내고 말 았다. 그러나 한민족은 35년 만에 대한민국을 세우고 백년이 채 안 되어 선진국으로 만들 었다. 선진 대한민국은 그 체질이 조선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제는 태극기를 쳐다 보고 이 국기가 과연 선진 대한민국을 상징 할 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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