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찾아오는 오후 한 때의 고요함에
불안감이 엄습해 오던 시간이 있었다.
한창 잠투정하는 너를 겨우 달래 낮잠을 재우고
나도 모르게 같이 잠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는데 네가 옆에 없었다.
깜짝 놀란 나는 거실로 뛰어 나갔다.
'조용하면 사고 친 다더니...'
너는 200매짜리 물티슈를 한 장 한 장 뽑아
도톰한 엠보싱인지, 화학성분 무첨가인지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거실 바닥에
거대한 휴지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시간들,
하필이면 믹스커피도 똑 떨어져
현기증이 일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는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대신에
멀찍이 앉아 그런 널 가만히 지켜봤다.
그렇게 잠시 거리를 두고 앉아있으니
마음은 점점 차분해지고 너는 혼자서 참 잘 놀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쉽게 무너지는 마음이나
곱게 나오지 못하는 말들은
사소한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럴 때는 모든 걸 내 방식대로 완벽하게 만들기보다는
팽팽한 마음의 끈을 잠시 풀어두고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어느덧 훌쩍 자란 너를 대하는 내 모습에서
그 시절의 거리 두기가 다시금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누구에게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들에
압도당하는 시간들이 있다.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거슬리고
누가 일부러 건드린 것도 아닌데 불씨가 점화되듯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던 시절,
말끝은 짧아지고 표정은 굳어만 간다.
"그냥 나 좀 내버려 둬."
차갑게 돌아서는 네 등 뒤에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을 삼킨 채 서 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엄마한테 누가 그렇게 말해?'
때로는 욱 하는 감정이 솟아올라
야속한 마음을 억누르는 데 많은 힘이 든다.
하지만, 너에게 그런 채근들이 닿기 전에
서둘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폭풍 한가운데에 서 있는 너를 구하려면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닫힌 방문 뒤에 한참을 서서
너의 작은 몸짓과 숨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잠시 후 너는 다시 방문을 열고 나와
마법처럼 내 앞에 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굳어 있던 네 얼굴은
거짓말처럼 평온을 되찾아 도려낸 시간의 끝에 서 있다.
"배 안 고파? 뭐 먹을래?"
멈춰있던 시간은 다시 흐르고
우리 사이의 거리는 원래의 자리를 찾아간다.
너는 언젠가는 또다시
거친 파도 속으로 뛰어 들어가겠지.
그 속에서 흠뻑 젖을 걸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나는 이제 너를 따라 그 파도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대신
해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손을 내밀 준비를 하면서.
참, 어려운 것 같지만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한
너와의 거리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