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잊었다.
사고 이후, 그의 기억 속에서 나는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의 첫 만남, 수줍게 내민 손, 여지껏 쌓아 올린 웃음과 눈물, 그 모든 것이...
병실 문틈 사이로 그를 바라보았다.
창가 침대 위, 흰 시트 속에서 그는 간호사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웃음이 낯설었다.
눈가의 잔주름과 고개를 젓는 버릇은 그대로였지만,
더 이상 그 안에 나는 없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맑았지만,
그의 말은 쐐기가 되어 내 가슴에 틀어박혔다.
이제, 나의 모든 시간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마치 연기처럼, 잡을수도 닿을 수도 없게 흩어져 버렸다.
처음엔 돌아와 달라고 기도했다.
아침마다 눈을 뜰 때마다, 그의 기억 속에서 내가 불쑥 피어오르기를.
우리였던 날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금 그 자리를 차지하기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바램이 그에게는 짐일 수도 있다는 걸.
기억을 잃은 그에게 우리의 과거를 억지로 안기는 건,
고장난 시계의 태옆을 억지로 감는 행위라는 것을...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나만의 집착이었다.
한 여름의 무더위가 가시고 노을빛 단풍이 물들어 가는 어느 날, 그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맑은 빛이 가득한 카페 창가에서, 그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오래전에 내가 사랑했던 바로 그 미소였다.
과거에 나를 향하던 눈빛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의 두 번째 첫사랑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가슴이 저렸다. 부러움이 스쳤고, 질투도 지나갔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덮은 건 이상하게도 안도였다.
그는 살아 있었고 다시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놓아준다는 건, 내 사랑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의 두 번째 첫사랑이 피어나는 동안,
나의 사랑도 조용히 자리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