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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 어느날 Nov 16. 2021

10) 삶에 쫓겨 놓아 버린 것들, 그것들부터 다시.

내가 원하는 삶은 '돈 때문에 피폐해지지 않는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고, 이는 곧 요즘 유행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삶일 것이다. 회사가 나를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멍청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나서, 나는 방향을 잃은 채 조급해졌다. 휴직을 기다리는 내내 '돈을 빨리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이 없는데, 다시 돌아오는 건 절대 안 돼.'와 같은 생각뿐이었다. 사무실에서 갑자기 가슴이 조여올 때나 퇴근 후 온몸에 올라온 두드러기를 확인할 때마다 내 맘은 더욱 조급해졌다. 분명 내 아픈 마음을 돌보기 위해 용기를 내어 멈추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조급함에 잡아 먹힌 내 두뇌는, 하루라도 빨리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게 곧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나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나는 휴직 몇 주를 남겨놓고도 무너짐을 멈추지 못했다.


지금도 불고 있는 투자 열풍, 주변에서 들려오는 떼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그 간 모아 온 돈 전부에 대출까지 받아 주식과 코인을 시작했다. 물론 심도 있는 공부 따윈 없었다. 뉴스 기사 몇 개가 정보력이었고 '합리적 투자'의 근거였다. 처음에는 수익이 좋았다. 십 분 만에 몇 백을 벌고 나서 '이게 세상이지.' 하며 앞으로 달라질 나의 세상에 설렘을 품었다. 내일 당장 수 백 퍼센트 폭등할 코인을 찾겠다고 말도 안 되는 '쌩쑈'를 했다. 모두가 그렇듯, 나는 다르다고 확신했다. 내 선택은 이성적이며 나는 남들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투자 전문가들이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조언에도 '당연히 그러면 안되지, 하지만 나는 달라.'라고 생각하는 웃기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는?

모든 돈의 절반이 날아갔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충격이 없었다. 진짜 미쳤었나 보다.

    



휴직으로 결정을 바꾸기 전에, 퇴사 결심을 말씀드리고자 부모님 댁에 직접 갔었다. 이제는 많이 건강해진 아버지와 이제야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난 어머니에게 또다시 충격과 걱정을 안겨주었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부모님은 내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사실 부모님은 평생 단 한 번도 내 선택에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부모님도 꽤나 놀란 듯 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 부모님에게 나는 항상 어디서나 인정받고 잘 해내는 결과만을 보여드렸고,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지를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항상 듬직한 모습만 보이던 아들이 아파하는 이유가 혹시 어머니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에게 퇴사가 아닌 휴직을 하기로 했다고 전화로 이야기를 했을 때, 내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지 안심하는 내색을 보였다. 나는 또다시 듬직한 아들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밝게 이야기했다.     




드디어 휴직 첫날, 아침 7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회사가 내게 안겨준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제주도와 부산에서의 추억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항상 쉬지 않고 일했었기 때문에, 부산과 제주도 같은 여행지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입사 후 입문 교육을 할 때의 제주도 한 달, 그룹사 OJT 할 때의 부산 한 달이 내겐 정말 소중한 추억이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좋아하는 해운대의 한 카페로 직행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그 만한 휴식이 없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추억에 잠긴 그때, 갑자기 가슴이 또 조여왔다. 정말 편안하게 있는데도 증상이 나타나서 나 또한 당황했다. 곧바로 조급함이 올라왔다. '아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앞으로의 3개월 동안 나는 인생을 바꿔야 해...' 하는 생각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바닷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조급함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정말로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모은 돈을 다 날려버릴 정도로 미친 짓도 했다. 그 광기의 처참한 실패 덕에 꽤 빨리 제정신은 차렸지만, 여기서 확실한 계획을 정하지 않으면 또다시 조급함이 나를 어떤 미친 짓으로 이끌지 몰랐다. 그렇게 또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맥주 한 캔을 들고 숙소 안 소파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OJT를 하기 위해 부산에 와서 한 달간 있을 때는, 매일 퇴근 후 몇 시간씩을 힘든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는데, 5년 후 다시 돌아온 나는 그럴 의욕이 없었다. 지금의 나는 뭘 해야 할지 결정도 못하는 바보이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멍청이였다. 너무 답답했다. 머릿속에 가득 찼던 모든 계획은 성급했고, 다른 계획을 세우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고대하던 부산에서의 3박 4일 동안에도, 나는 내 마음을 돌보기는커녕 또다시 나를 몰아붙이고 다그쳤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머니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오타 가득한 장문의 카톡. 나는 살면서 우리 어머니에게 편지나 문자 한 통 받아본 적이 없다. 남자들만 있는 가정을 평생 혼자 이끌어오시면서, 우리 어머니는 스스로의 마음을 돌보기에도 벅차셨을 것이다. 웃음을 잃어버린 가정에서 혼자 버티기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그런 어머니가 어린 시절 우리 아들들에게 가끔 해주던 애정 어린 표현과 행동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를.


'너의 행복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그것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너의 행복이 내 행복이야. 나는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 뭐든지 다할 거야.'


 마지막 문장들에 눈물을 쏟아냈다. 결코 어떤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문장을 쓰기 위해 며칠을 걱정했을 어머니의 마음, 평생을   없는 말을 건네기 위해 내야 했던 어머니의 용기, '내가 기어이  우리 엄마를 걱정하게 만들었구나'에서 오는 죄책감, '나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에서 오는 좌절감. 여러 가지 감정이 복받쳐 올라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내었다.


어린 시절의 결핍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는 내 모습이 부모님에게는 상처였을 것이다. 어린놈이 힘든 게 보이는데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대견하기보단 사무쳤을 것이다. 매달 아무렇지 않은 척 보내주는 돈을 받으면서 얼마나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을까. 내 새끼가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힘없이 말할 때에 부모님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행복해져야 한다. 내 마음이 진정으로 편안해져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다. 살면서 다가올 수많은 고통에도 내 마음을 지켜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살면서 지금까지 무엇이든 잘해왔다. 잠시 지쳐서 멈춰있을 뿐이다. 웃음을 찾고 내가 다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때, 그때 또다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웃음을 지을 때가 언제였던가? 삶에 쫓기고 버티느라 지쳐서 나의 행복을 잠시 놓고 있었었다.


내 마음이 편안하고 스스로 기쁘다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오롯이 그것 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이전 10화 09) 바로잡으려 멈췄는데, 또 틀린 길을 가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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