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데미안

나의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by 장혁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가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데미안’을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데미안’입니다. 간단히 말해, 이 소설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자아 찾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한 주제인 자아 찾기의 이야기를 헤르만 헤세는 그 특유의 구조와 상징성을 통해 특별한 이야기로 빚어냈습니다. 또한 흔한 주제는 달리 말하면 보편적인 주제입니다. 세대를, 또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인 것이죠. 이렇듯 보편적인 주제와 이를 풀어내는 헤세의 특수성이 만나 고전 ‘데미안’이 탄생했습니다.


첫 소제목은 '두 세계'입니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전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이름의 세계이자 사랑과 철칙, 모범의 세계 그리고 후자는 하녀들과 행상들, 귀신 이야기와 추문들이 있는 세계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선과 악이 결정되어 있는 세계에서 싱클레어는 태어났습니다. 부족함 없이 밝은 세계에서 살아가던 싱클레어는 외부로부터의 충격, 즉 크로머의 등장으로 인해 어두운 세계에 붙잡히게 되지요. 밝은 것이 좋은 것, 선이라고 믿어 왔던 싱클레어에게 어두운 세계에 빠지는 것은 죄악이고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렇게 공포에 떨던 싱클레어에게 구원자 데미안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흔한 이야기와 같은 방법으로 싱클레어를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데미안은 오히려 싱클레어에게 어두운 세계가 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두 번째 세계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선과 악이라는 체계 자체를 흔듭니다. 그렇게 기존의 이분법적인 두 세계를 무너뜨리며 크로머와의 일화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그 후 이야기는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던 싱클레어의 두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스스로 새로운 세계, 즉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데미안을 만나면서 한 번 흔들렸던 싱클레어는 크로머가 사라지면서 다시 밝은 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기존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 있었고, 두 번째 어두운 세계로의 경험으로 인해 이 의구심이 다시 드러납니다. 두 번째 경험은 바로, ‘성’입니다. 크로머가 어두운 세계를 향한 외부의 자극이었다면 ‘성’은 싱클레어 내부에 있는 어두운 세계를 향한 자극인 것이죠. 다시 한번 어두운 세계에 발을 내디딘 싱클레어는 방황했고,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스스로 답을, 즉 자아를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싱클레어는 방황하기도 하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헤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삶의 욕구가 주변 세계와 가장 극심하게 부딪히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때, 전 생애에서 단 한 번,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싱클레어는 그를 감싸던 세계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재건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선과 악으로 인위적으로 구분된 곳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세계, 신에게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하는 곳, 그게 안된다면 스스로 악마까지도 품어 내는 그런 신을 만들어 내서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눈을 감지 않는 곳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한 개인의 변화를 헤세는 그 유명한 비유로 표현하게 됩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선과 악이 결정되어 있는 기존의 세계, 가치관이 이미 확립된 곳이 알입니다. 그리고 그 알을 깨고 나오려는 개인, 싱클레어는 새로 표현됩니다. 기존의 세계를 무너뜨릴 때, 남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자기만의 가치관을 세울 때 한 사람은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품어 내는 새로운 세계의 신, 즉 그 자신이 아브락사스가 되는 것이죠.

이야기는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자기 손으로 만든 세계, 자아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야기 끝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꼬마 싱클레어, 들어 봐! 나는 떠나야 해. 자네는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하겠지. 크로머나 그 밖의 일 때문에 말이야. 그땐 네가 나를 불러도 내가 말이든 기차든 되는대로 막 타고 올 수는 없어. 그때 너는 네 내면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이미 너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알겠지?”


마치 책을 읽는 나, 당신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는 듯한 데미안의 말과 함께 이 소설은 끝이 납니다.

‘데미안’이 묻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두 세계’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까?

나뉘어 있는 세계의 선과 악은 누가 결정한 것입니까? 당신이 결정한 것입니까?

당신은 스스로 쌓아 올린 세계에서 당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이유는 가치관이 쏟아지는 사회, 자아가 넘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관이, 또 쏟아지는 자아가 자기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우리는 휩쓸리고 있는 것은 않을까요.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지적한 세계는 선이라고 결정된 하나의 가치관, 하나의 자아만 존재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선이라고 외치는 것들의, 또 자아인 척하는 가짜의 홍수에 살고 있다. 두 세계가 아니라 무수한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죠.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반대까지도 품어내는 아브락사스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겠죠. 하지만 그 무수한 세계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릅니다. 넘치는 정보에, 타인의 의견에 휩쓸려 그들의 가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에 심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심해야 합니다. 당신의 아브락사스가 타인의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헤세의 말을 인용하자면,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우리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을 살아가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쉽게 얻었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서 솟아난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알을 깨기 위해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고 데미안은 이야기합니다.




keyword
이전 06화미움받을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