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럭이는 사실 슬픔이였다.

나의 우울증 자각 증상

by 장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 라일리 안에는, 늘 버럭버럭 화를 내는 '버럭이'와 우울한 표정으로 기운 없이 걸어 다니는 '슬픔이', 그리고 기쁨, 소심, 까칠 등의 감정이 의인화되어 살아간다. 나는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늘 조직 내 '버럭이'였다. 평소엔 온순하고 빠릿빠릿하지만 답답하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참지 못하고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직장 생활하며 억울한 일이 왜 없겠나. 역지사지 안 되는 남을 탓해봐야, 그 입장에선 나 역시 역지사지를 못하고 있는 것일 텐데. 하지만 우습게도 그런 상황에선 이성적인 판단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카페인, 친한 동료 그리고 친구에 의지했다. 술은 잘하지 못하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사람은 좋아하지만 시끄러운 곳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시엔 취미도 딱히 없었다. 그만큼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창구가 제한되어 있었다.


회사에서는 울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정작 나를 울린 사람한테 들었다. 그 길로 친한 동료 세모에게 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스트레스가 극단으로 치솟자 애꿎은 데에 화를 냈다. 그러면 서로가 힘들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 시절 사내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세모와 네모뿐이었다. 이제 와서 변명하자면, 극도의 우울증으로 내 감정을 누군가에 맡기지 않고서야 눈알이 돌 지경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갱년기 여성처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모니터 화면 아래 시간을 자꾸 체크했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느 날 세모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우울증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냐.'고 조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눈물 20%, 화 80%의 비율로 채워진 버럭 인간이었으므로, 화병이 아니고 우울증일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선뜻 와닿지는 않았다. 내가? 우울증이라고? 그냥 이 상황이 너무 짜증 나는데? 벗어나고 싶은데?


하지만 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순한 편이다. 특히 언니인 세모의 말은 잘 들었다. 그렇게 세모와 네모 그리고 탱이의 격려를 받아, 회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에 전화를 걸었다. 첫 방문 시에는 문진, 검사에 1시간이 소요된다는 안내를 받고 약속한 날짜만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나는 주변 우울증 환자들에게, 미지의 세계인 정신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약을 먹으면 정말 효과가 있는지를 물어봤다. 내과나 정형외과를 밥 먹듯이 다녔던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곳들을 갈 때는 한 번도 후기를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경험해 보니 별일이 아닌데 그때는 '정신과'라는 세 글자가 나에게 너무 큰 장벽이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저 세 글자를 도저히 넘지 못해서 방문을 꺼리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내가 여태까지 다닌 수많은 병, 의원 중에 정신과만큼 구성원이 친절하고, 나를 나만큼 생각해주는 곳은 없었다고, 그러니 걱정 말고 그냥 문 열고 들어가시라고, 접수하고 앉아 있으면 알아서 다 설명해 주신다고."


의사 선생님과 만난 첫 20분 간, 현재 나의 증상과 병원에 오게 된 이유 등을 가볍게 대화하듯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이전에 증상을 겪은 적 있는지, 현재 증상의 주관적 심각도는 어떠한지, 가족 관계, 회사 관계, 친구 관계 등을 질문하셨다. 질문에 잘 대답하고, 이어 “눈물이 엄청 많이 나는 게 우울증상인 줄 알았는데, 나는 화가 나서 우울증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선생님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었다.


20분 간 태블릿을 통한 우울증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마주한 순간,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우울증이 심각해서 당장 약물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겁이 난 나는 약을 먹고 싶진 않다고 했지만, 중증 우울도가 나타난 이상 상담 치료만으로는 힘들 거라며 약물치료를 다시 한번 권하셨다. 마음을 추스른 내가 받아들이자, 선생님은 내가 복용하게 될 알약 프록틴(항우울제)과 자나팜(불안장애 치료제)에 대한 효능과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전장 같은 병원에서 나오는 길,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 결국 우울증 맞았네.', '나 진짜 바본가 봐.' 전자는 인정이었고, 후자는 동정이었다. 불안을 다스리지 못해 울기보다는 화를 선택한 나는, 이 지경이 되도록 모른 스스로에 대해 딱한 감정이 들었다. 내 생각보다 우울의 기간은 길었고, 반복해서 발생하는 이 증상이 완치되려면 꽤 오랜 여정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현재 병인(病因)인 직장에 다니는 이상, 감정을 약물로 조절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약을 먹고 나서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냐고? 아니었다.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고 세모, 네모에게 화를 냈다. 약물이 작용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축적되어야 했다. 매주 상담을 받고 약을 타오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선생님께 "원인이 제거되지 않으니까 약을 먹어도 크게 바뀌는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자나팜(불안장애 약)을 먹었더니 사장님 앞에서 기획안 발표할 때 떨리진 않더라."하고 농담을 던진 후, 폭탄을 던졌다. "사실 제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 있는데, 혹시 회사를 관두고 직무를 바꾸는 건 어떨까요?"


이전 상담에서 퇴사는 가장 마지막, 최후의 보루라고 했던 선생님의 눈이 천천히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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