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제 잠이 듭니다.

불면증이 성큼 다가왔다.

by 장권

선생님은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창작 활동을 꾸준히 해왔고 성인이 되어서는 글쓰기로 적지 않은 수익도 얻었다. 글쓰기는 내 마음속에 있는 '궁극의 필살기'였다. 선생님은 내 의견을 존중하였다. 다만 세 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 번째, 프리랜서 커뮤니티에 들어갈 것.

두 번째,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고정적인 활동을 할 것.

세 번째,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운동을 할 것.


선생님은 10여 년 간 직장 루틴에 맞춰져 있는 내가 불규칙하게 생활할 것을 염려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속감을 잃을 경우 멘탈 에너지가 더 빠르게 고갈될 것을 대비하여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맞벌이 가정에서 누구나 그러하듯, 어린이집-유치원 종일반 코스를 거쳐 초, 중, 고, 대학교 그리고 직장까지 쉼없이 달렸다. 성인이 된 후 소속이 없는 기간은 단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백수 생활(aka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 자연스레 활동량도 줄어든다. 개인의 굳건한 의지가 있지 않는 이상, 규칙적으로 행동하기 힘들뿐더러, 광합성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비타민 D와 멜라토닌 호르몬이 체내에서 역할을 못할 수도 있다. 이런 탓에 규칙적으로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활동(ex.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파트타임, 운동 등)을 꼭 루틴에 첨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쓰는 현재, 아직 프리랜서 커뮤니티에는 가입하지 못했으나 매일 광합성을 위해 외출을 감행하고 있다. 구립 도서관에 출석하거나 북카페에 가거나 일반 카페에 글쓰기 작업을 위해 들렀다. 대부분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 있었고 혹시나 먼 지역에 있는 카페를 갈 때도 도보 이동이 우선, 대중교통이 보조였다. 패턴이 되다 보니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은 날(도서전 다음 날. 몸살 걸림)이나 비가 많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집에 머무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게 의사 선생님께 퇴사 상담 후 다음 날,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혔다. 복잡한 과정들이 있었지만 결국 내게는 인수인계를 위한 두 달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은 이전보단 힘들지 않았다. 사측과 나, 서로 프레셔를 내려놓았고 나도 맡은 일을 내팽개치고 나가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아 최선의 8할 정도는 쏟았다. 각종 회의와 발표를 끝까지 책임졌고 퇴사 면담을 한 날도, 그다음 날도 야근은 이어졌다.


나는 타지 생활을 시작한 대학생 때부터 하루에 한 번 엄마와 통화를 했다.(주말 제외) 생존 보고용 전화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나와 엄마의 퇴근 시간이 달라진 탓에 아빠와 주로 통화를 했다. 사직서가 수리된 그날도 어김없이 아빠와 통화를 했다.


"아빠, 내 회사 그만둘라고. 오늘 사직서 썼다."

"뭐? 왜?"

"내가 이제까지 엄마, 아빠 걱정할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사실 내가 건강이 좀 안 좋다."

"어데 아프나?"

"몸도 몸인데, 정신 건강이 좀 안 좋네. 사실 정신과 가서 약 받아먹고 있다."

"아이고, 어야노."

"의사 선생님이랑 상의하고 계획해서 그만두는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쉬는 동안 글 쓰면서 돈 좀 벌어볼게. 안되면 재취업하지, 뭐. 걱정 마이소."

"내가 니 능력 걱정하나. 니는 다 잘하지. 그냥 아프다니까 걱정이지."

"괘안타. 아빠, 엄마한테는 아빠가 좀 전해줘."

"알겠다. 약까지 무야 되나."

"생각보다 좀 심하다카네. 그래도 약 먹어서 많이 좋아졌다."

"그래, 알았다. 쉬어라. 저녁 챙기묵고."


아빠는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한테 전해 달라는 내 말과 다르게, 말도 못 꺼냈다고 했다. 매일 새벽 혼자 속으로 내 걱정을 했다. 의도치 않게 불면증 환자가 한 명 더 생겼다. 생각보다 아빠는 여렸다. 일주일 후 통화에서 나는 아빠에게 '내가 아프다고 말하기 전엔 잘 잤으면서 왜 갑자기 잠 못 자노.'하고 말하며 웃었다. 아빠는 퇴사 후에도 내게 매일 '살아있는지'를 전화로 보고하라고 했다. 나는 '안 죽는다.'라고 웃어넘기면서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빠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게 하다니 아픈 것만으로도 불효를 저지른 것만 같았다.



아빠가 용기 내어 엄마에게 내 소식을 전한 날, 엄마는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아프다매, 정신과까지 갔나. 아빠와 나눈 대화 내용과 같았지만 엄마만의 걱정이 묻어났다. 그러다 결국, 엄마 아들도 출동했다. 출장과 야근이 잦은 탓에 같이 밥을 먹은 지도 꽤 된 나의 서울 보호자.


(참고 : 경상도 사람은 친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오빠야라고 부른다.)

카페에서 오빠야는 ‘엄마에게 대충 얘기를 들었지만 나에게 직접 듣고 싶다’며, 나에게 증상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물었다. 부모님께 하지 못했던 자세한 증상을 얘기하자 한숨을 내쉬며 걱정했다.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하더라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그 와중에 퇴사하고 나서 고기를 먹고 싶으면 꼭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오빠야는 사라졌다.


며칠이 지나 오빠야는 술에 취해서 전화를 했다. 원래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평소 통화를 민망해하며 짧게 끝내는 성격인데, 술 마시고는 전화해서 '괜찮나, 약은 먹고 있나.'하고 물어봤다. 그날따라 기분이 평온했던 나는, 귀찮은 마음에 '빨리 끊어라. 얼른 들어가서 술 마셔라.'고 잔소리를 했다. 끊기 전까지도 ‘아빠한테 매일 전화해라.’하던 혀꼬부라진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동생은 다정한 오빠야 밑에서 철이 들지 않는다.



그 시기,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불면증이었다. 오히려 우울감을 강하게 느낄 때는 잠을 잘 자다가, 퇴사가 결정되고 나니 3시간, 4시간 자거나 아예 잠이 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출근시간을 바꾸기도 하고, 오전 반차를 이용해 새벽 내내 이루지 못한 잠을 아침에 겨우 해결하는 일이 반복됐다.


퇴사를 하면 모든 고민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계획과 달리 두 달을 더 일하게 되었고, 당장 퇴사 후 생활이 불안해 스트레스가 가중되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PMS(생리전증후군)으로 불면을 앓고 있었다. 이 세 가지가 한 번에 나를 덮칠 확률을 구하시오.(꽤 높음)


나는 배란기부터 생리 3일 차 정도까지, 즉 한 달의 반을 PMS를 겪는 끔찍한 저주에 걸렸는데, PMS 불면은 정말 지독하리만큼 나를 괴롭혔다. 잠이 들려고 하면 갑자기 몸 구석구석, 하물며 발가락 사이까지 간지러워져 긁어댔고, 그렇게 긁다 보면 뇌가 활성화되고 심장이 두근대 다시 잠이 들기까지 수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은 이런 나에게 큐로켈정 12.5mg(조현병, 양극성 장애 치료제이지만 저용량은 수면장애에 도움을 줌)을 처방했다. 수면제와 달리 내성이 생기지 않으므로 매일 먹어도 괜찮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날 밤, 큐로켈과 첫 만남은 강력했다. 복용한 지 1.5시간~2시간 후, 독한 감기약을 먹었을 때처럼 나른해지며 손발이 저릿저릿 처지는 느낌과 함께 잠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깊은 수면을 했더니 기분도 상쾌했다.


단점이라고 하면, 알람을 듣고 즉각 눈이 떠지더라도 몽롱한 약 기운 때문에 머리를 베개에서 떼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선생님은 그럴 경우에 복용시간을 앞당기면 된다고 했다. 10시쯤 먹던 약을 9시, 9시 반으로 당겼더니 이전보다는 수월했다. 덕분에 퇴사일까지 문제없이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요즘 어떠셨어요?" 하는 선생님의 질문에 "뭐, 괜찮았던 것 같아요."로 시작하던 대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서운함 성토대회가 되었고, 그래도 되는 자리임을 알면서도 은근히 쭈뼛댔다. 30 넘은 성인이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사소한 걸 늘어놔도 되나 싶은 마음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진료비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뭐라도 우울감이 있거나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일은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씁, 하고 모니터로 눈을 돌려 무언가 써내려 갔다.


"ADHD 검사를 좀 해봤으면 좋겠는데요."

"검사 비용이 높지 않나요?"

"10만 원이에요."


내가 주의력 결핍 금쪽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치고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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