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다음날 아침, 머리 꿰맨 부분 소독 때문에 숙소 근처의 병원을 찾아갔다. 그때 내가 느낀 나의 상태는 조금 머리가 아프다 정도였는데 병원에서 체온을 재어 보니 39.2도의 고열이었다.
소독을 마친 후 일정은 친구들과 함께 하지 않고 우리 가족은 집으로 먼저 돌아왔다. 아기들도 함께 있다 보니 열이 나는 상태에서 만나는 것을 피하려고 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아주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푹 쉬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쉬고 있었는데, 늦은 저녁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간호사인 막내 동생이 꼭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거나 열을 낮춰야 한다고 했고 엄마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셨다. 남편은 아기를 봐야 하니 둘째 동생과 같이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다.
솔직히 가야 할까 짧게 고민도 했고 원래의 나라면 그냥 집에서 쉬면 나을 거라고 했을 텐데, 그때는 엄마의 말씀을 듣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엄마와 동생의 의견에 따른 것은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어제 갔던 종합 병원의 응급실로 찾아갔다. 처음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고 열이 나서 링거를 맞으러 왔다고 하니 그 정도로 응급실 이용은 어렵다고 했다. 일단 몸 상태가 안 좋으니 체온과 혈압을 재보자고 해서 혈압을 쟀는데… 그때부터 상황이 빠르게 전개됐다.
혈압이 정상 범위보다 한참 낮다고 했다. 나는 응급실 구석의 침대에 눕혀졌고 응급실 의료진들이 내 주변으로 하나둘씩 모였다. 함께 있던 엄마와 동생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남편에게 연락을 했고, 남편은 곧바로 아이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이는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의료진은 나를 “원인불명의 급성 심근염”으로 진단했다.
병원에서는 상급병원으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의료 파업으로 주변에 나를 받아줄 수 있는 병원이 많지 않았다. 몇 군데에서 받아준다고 했지만 대부분 거리가 멀거나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막내 동생에게 정말 고마운 상황이 또 생긴다. 동생이 대전의 병원 응급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마침 그때가 근무 중이었고, 마침 응급실에 근무하고 계셨던 심장내과 교수님께 직접 말씀드려 대전의 병원에서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그날 밤 11시, 나는 55퍼센트의 능률을 가진 심장을 가지고 대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여러의미로 기적과 같은 하루였다. 만약 내가 계속 집에서 누워 쉬다 잠에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음날 새벽 1시, 대전의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 도착 후 나의 심장 능률은 40퍼센트 정도였다고 한다. 대전에서의 기억은 약간 흐릿한데, 목이 말라 동생에게 얼음을 넣어달라고 계속 말한 것과 온 가족들이 나를 보러 와서 얼굴들을 봤던 짧은 순간들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당시 나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 표정을 살피고 대화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응급 중환자실에 있어서 보호자 동반 입실이 안되었다 보니 남편은 항상 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동생이 응급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간호사였기 때문에 동생이 옆에서 나를 보살필 수가 있었다. 동생은 병원에 있는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내 옆을 지키며 모든 검사와 치료의 과정에 함께 했다고 한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이곳에서 상황은 급격히 계속 안 좋아졌다고 한다. 나의 상황은 오전에 상황이 호전되는 듯했다가 오후 1시쯤 심장 능률이 급격히 20퍼센트로 감소하게 되었다. 몸의 색이 새하얗고 새 퍼렇게 되었다고 한다. 호흡도 점점 가빠져서 정상적으로 숨 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병원에 왔다가 아기 때문에 집으로 이동하던 부모님을 다시 병원으로 오시라고 하고, 시부모님도 오시라고 연락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던 것 같다.
상황을 지켜보던 교수님께서는 생명 지속을 위해서는 에크모 시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가족의 동의를 받고 바로 시술을 진행했다. (에크모 시술은 몸에 관을 삽입해서 심장 기능을 대신하게 해주는 시술이다.) 시술 후에도 정상적인 회복의 추세를 보이지 않고 호흡은 여전히 불안정했기 때문에, 결국 오후 11시쯤 인공호흡기를 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