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굿을 하라고

#7. 새로운 비극 (3)

by 진우


등에 업힌 아들을 조심스레 보았다. 볼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엊저녁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말이다.


“감기 같은데. 병원은 가봤나. 의사는 머라 하더노?”

“잘 모르겠답니더.”


아내는 이미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용길 형님의 허락을 받고 그날 오후에는 아내와 함께 서면 김태인 소아과를 찾았다. 아들은 아내의 품에서 여전히 밭은 숨을 내쉬었다. 진찰을 마친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기 아부지, 큰 병원에 함 가보이소. 이거는 작은 병원에서 진찰할 병이 아니네예.”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병이라니. 큰 병원이라니. 아내가 하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또 무언가를 떠올린 듯했다.


택시를 타고 곧장 춘해 병원 응급실로 갔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끝난 진료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내는 병원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우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뭐 보능교? 사람 우는 거 처음 보나! 울지 마라. 이런 돌팔이 새끼들이, 이 꼬락서니로 진찰하믄서 돈 받아 처 묵나? 병도 못 알아내는 것들이 무신 의사고? 일어나라. 다른 병원에 가 보자.”




이튿날 새벽부터 병원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진찰을 끝낸 적십자 병원의 의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아기 보호자님. 서울의 큰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요, 거기 가면 나을 수 있겠습니꺼? 아니, 무슨 병인지라도 알 수 있겠습니꺼?”


의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무 곳이 넘는 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병명조차 속 시원히 말해 주는 곳이 없었다. 글쎄요. 다른 병원에. 큰 병원에. 우리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들은 눈에 띄게 야위기 시작했다. 젖을 빨지 못했고, 어쩌다 물이라도 먹이면 고스란히 토해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헐떡이다가 고쳐 업으면 또다시 힘에 겨워 자지러지기를 반복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제대로 울지 못하니 열흘이 지날 무렵엔 뼈만 앙상하게 남은 흉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보름쯤 지난 어느 오후, 메리놀 병원 복도에서 내가 건넨 우유를 받아 들고 아내가 힘겹게 말했다.


“있잖아예, 우리, 거기라도 가 볼랍니꺼?”

“어데?”

“무당집에요.”


즉답을 할 수는 없었다. 당시 나는 바하이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으나 공사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모여서 다 같이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무당이라니. 순간 망설여졌다. 그러나 아내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간절함은 충분히 수긍이 갔지만, 그깟 무당이 알면 뭘 알겠어?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무섭게 눈이 찢어진 할머니가 아들을 조심스레 받았다.


무당 할머니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아들은 뒤로 목을 젖히며 헉헉거렸다. 눈을 감고서 아들을 조심스레 훑으며 어루만지던 할머니가 갑자기 내게 쏘아붙였다.


“니가 애비가? 니가 사람이가? 이거는 병이 아닌 기라. 이거는 장군님이 노한 기라. 애비 니, 저질렀제? 솔직히 말해라.”

“예? 저지르다니요?”

“니, 해서는 안될 몹쓸 짓을 했나, 안 했나. 터부 말이다.”


해서는 안될 몹쓸 짓? 그때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모두가 출근을 만류하던 그날이었다. 오전부터 우리가 지은 집의 대들보를 올리는 상량식上樑式을 했다. 집주인이 돈 자랑도 할 겸 잔칫상을 차린다며 엄청나게 큰 돼지를 끌고 왔다. 환호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뒷마당으로 갔다. 거기서 돼지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갈라진 배 사이로 펄떡이는 심장을 보았고, 그것이 꺼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삶은 돼지고기를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간나 낳을 달月에는 머이든 조심해야 하는 거이디. 험한 것도 보면 아이 되구, 못난 것도 보면 아이 된다. 알갔니 막내 아범.”


주인집 어머니의 지청구가 떠올랐다. 그럴 리 없다. 그건 미신일 뿐이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적 없습니더. 절대 없습니더.”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의 무당은, 그래도 굿을 하면 장군님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굿을 하는 데 30만 원이 든다고 했다. 쌀 한 말에 일만 육천 원, 내 일당이 칠백 원이던 때였다. 죽기 살기로 일했으니 모아둔 것이 얼마간 있긴 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리 작은 돈이라 한들 그깟 굿 따위에 덜컥 써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는 그날부터 앓아누웠다. 그것은 곧 어떤 일이 있어도 굿을 해야겠다는 고집의 표시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따, 우리가 남이 아니랑께. 이건 그냥 주는 게 아니란 말이시. 용기리 성님이랑 반반 준비한 것잉께, 그냥 써부러. 아니 우덜이 동상마냥 마누라가 있나, 자식새끼가 있나? 그라고 누가 안당가? 우리 아가가 팔팔허게 살아나믄, 그렇게 살아나믄, 동상이 우리 모른 척 할랑가? 죽을 때꺼정 우덜 업고 다니면 된당께. 우선 자식 새끼버텀 살리고 보자고잉.”


비가 내려 일을 쉬었던 저녁. 어금니를 깨물어가며 애써 울음을 참는 내 셔츠 속으로 만종 형님이 신문지 뭉치를 쑤셔 넣었다. 돈이었다.


WRM4c9Z1iuY1LsL6Il1mhfR9j_o 1966년 첫 휴가 때 딸과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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