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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Sep 15. 2022

이별기 離別記 (3)




   “어머니,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아무리 먹고 살기 어려웠다한들 도대체 어떻게……”


   오 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이었지만 할머니는 큰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멈추지 않는 눈물만 옷고름으로 겨우 찍어낼 뿐이었다. 고모가 업고 있던 젖먹이뿐만 아니라 아랫목에 눕혀진 갓난아이까지 큰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곁에 앉았던 어린 아버지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큰아버지의 절규는 방문을 넘어 담장 밖으로까지 퍼졌다.

   “다른 사람의 자식을 둘이나 낳다니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제사를 어떻게 지내려고 그럽니까? 어머니, 절대로 이러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큰아버지는 유 씨劉氏 영감네 둘째 아들, 양식陽植 아재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때 할머니 나이, 겨우 서른다섯이었다. 어린 자식이 둘이나 되는 젊은 과부가, 생존의 극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남의 가사家事나 밭일을 거드는 것, 아니면 뒷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장터에서 파는 것 따위가 전부였다. 그것만으로 세 식구가 버티기란 당연히 불가능했다. 


   어느 날, 같은 마을에 사는 노파가 할머니를 찾아왔다. 이렇게 비루하게 살지 말고 차라리 유 씨 영감 네로 들어가서 살면 어떻겠냐는 말을 전했다. ‘들어가서 산다’는 것은 곧 유 씨 영감의 부인이 되라는 뜻이었다. 유 씨의 본부인은 둘째 아들 양식이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두 번째로 맞이한 여자는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 자식이 부富의 근원이라 믿었던 유 씨 영감은, 이웃들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없이 매파를 보내, 아직은 젊고 예쁜 할머니의 속내를 떠보려 했던 것이다. 자신의 청을 들어주면 적어도 끼니 걱정은 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조건도 얹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할머니는 펄쩍 뛰었다. 다른 마을도 아닌, 같은 동네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고 화부터 냈다. 이웃의 눈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반대할 것이 뻔하지만 적어도 큰아들의 의견은 물어야 했다. 하지만 아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양식이는 가끔 고향집에 편지를 보내온다는데, 글을 모르는 할머니로서는 큰아버지에게 직접 편지를 쓸 수도 없었고, 연락처를 모르니 전화를 걸 수도 없었으며, 마주하기가 불편한 유 씨 영감을 굳이 찾아가서 본인의 사연을 아들에게 전해 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을 택하겠다며 근근이 하루하루 버티던 할머니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1947년 늦여름,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으로 마을의 절반이 강물에 휩쓸렸고, 할머니의 아랫채 역시 흔적도 없이 폐허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하루 한 끼로 어렵사리 버텨오던 할머니에게 그것은 치명타가 되고 말았다. 어린 자식들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면 할머니의 선택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못난 에미를 용서해라. 우리 세 식구가 죽지 않고 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듣기 싫어요. 차라리 죽더라도 그것만은 말았어야죠. 무슨 말을 한다한들 나는 절대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어요.”


   큰아버지는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와 뒷산에 올랐다. 마지막을 결심한 걸음이었다. 애지중지 모았던 금만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것만 안전하게 가지고 돌아왔다면, 비록 이미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의미 없는 가정假定이었다. 

   자책을 하며 뒷동산 벼랑에 올랐다. 모든 것을 끝내자. 그러나 막상 바위 끝에 서자 선뜻 실행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해가 저물도록 먼 산만 바라보며 울다가 달이 머리 위에 걸린 다음에야 마을로 내려왔다.


   큰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온 동네에 전해졌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불똥이 튀었다. 큰아버지와 같이 고향을 떠났던 양식 아재의 생사가 분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났고, 인민군이 강원도를 장악했고, 그곳에 있던 미군 부대들은 모두 후방으로 철수를 했고, 거기까지가 읍내를 거쳐 마을에 전해진 소식이었다. 


   다음날 아침 유 씨 영감이 큰아버지를 불렀다. 

   “양식이는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데, 함께 있었다는 너는 어떻게 돌아왔느냐?” 

   큰아버지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화가 잔뜩 난 유 씨 영감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 없었다. 아들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유 씨 영감의 불안함은, 일하기가 싫었던 큰아버지가 부대에서 도망을 쳤다는 억지로 이어졌다. 금이니 현금이니 이런 것들은 모두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윽박질렀다. 결국 그날 밤, 할머니는 유 씨 영감네에서 나와야 했다. 쉽게 말해, 쫓겨난 것이었다. 유 씨 성을 가진 두 아이도 함께였다. 


   큰아버지는 그 모든 현실이 싫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일거리가 없었다. 유 씨 영감의 눈치를 보느라 마을 사람들은 큰아버지에게 더 이상 머슴 일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원입대를 하자. 전시戰時에 가장 안전한 곳은 군부대일 것이다. 직업 군인도 괜찮을 거야. 그곳에서 다시 한번 그때처럼 돈을 모으자.'


   큰아버지는 이튿날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동안 결심한 대로 자원입대를 신청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병무 담당 직원은 큰아버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전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큰아버지는 생계 부양 의무자로 지정되어 군 복무가 자동으로 면제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전시지만 그런 조건으로는 자원입대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강제 징집될 거라는 말로 자신을 겁박하던 대구의 김판수 대위가 하필 생각났다.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며칠 뒤 큰아버지는 저녁 짐을 쌌다. 할머니와 고모,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립문 앞에서 옷깃을 잡는 할머니를 향해 큰아버지는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그리 알고, 잘 사세요.”


   큰아버지는 밤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전쟁 중임에도 부산은 경기가 좋았다. 돈이 될 일들이 차고 넘쳤다. 다행히 큰아버지는 눈치가 빨랐다. 우연한 기회에 건설업에 발을 들였고, 집 장사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결혼도 하고, 세 아들을 낳았다. 어쩌다 고향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가족들의 소식을 듣게 되는 때도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애써 외면했다.


   1970년 어느 봄날 저녁, 뜻밖에 큰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고향에서는 더 이상 살기 어려우니 자신도 부산에서 일을 하겠다며 자리 잡을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했다. 큰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 화부터 났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살 생각이었는데, 그때까지 어머니와 형제들을 돌보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으라는 뜻이었는데, 응당 그렇게 해야 할 동생마저 고향을 떠나오다니. 큰아버지는 아버지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손찌검도 했다. 의절義絶해도 좋다며 욕설도 퍼부었다. 아버지는 울면서 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해 나의 형이 죽고, 이듬해 태어난 나까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일이 생기자 부모님은 야반도주하듯 고향 마을을 떠났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큰아버지는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던 큰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의 돈독한 정情만이 형제간의 위태로운 관계를 간신히 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같은 업종에 발을 들이게 된 아버지는 직간접적으로 큰아버지를 만날 때가 많았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살가운 인사를 하는 법이 없었고, 때로는 아버지가 맡은 공사를 못하게 막거나 남에게 줘버리는 일도 있었다. 몇 단계를 거쳐 아버지가 큰아버지 공사의 한 부분을 맡게 되었을 때조차 올바른 정산을 제때 해주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겨우 용기를 내서 찾아간 아버지에게 큰아버지는 또다시 막말을 해댔다. 

   “고향이나 지키고 있을 일이지 네깟놈이 무슨 돈 받을 일을 한다고 그래? 썩 꺼져!”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큰아버지를 단 한 번도, 적어도 우리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 미움의 방향이 결국은 할머니를 향하고 있음을 아버지는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설추석 명절이 되어도 형제가 함께 고향을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큰아버지는 아예 고향을 찾지 않았고, 가뭄에 콩 나듯 큰어머니의 친정 나들이가 있을 때면 남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할머니 집 툇마루에 작은 봉투를 두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


   사정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욕을 하는 큰아버지였지만 적어도 우리 형제들에게만은 달랐다.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양복을 차려입은 아저씨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땀을 닦으며 다가가 보면 거기에 큰아버지가 서있었다. 아버지를 혼내던 모습이 생각나 겁을 집어먹고 주춤거리는데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큰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리기도 하고, 품에 안고서 몇 바퀴를 빙빙 돌기도 했다. 

   마지막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품에서 꺼낸 흰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면서 항상 그렇게 말했다.

   “이걸로 누나랑 동생이랑 책도 사고, 공책도 사라.”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큰아버지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내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나 학교 앞에서 반나절 넘게 기다려 등록금이나 용돈을 전해주는 때가 많았다. 큰아버지가 누나와 나를 만나고 돌아간 날이면 우리 집의 분위기는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닥에 봉투를 내려놓은 채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그리고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친구도 아닌 둘도 없는 친형제간인데 그냥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나?”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만의 세상이 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그런 냉랭한 관계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도 어른이 되었다.


   두 분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화된 계기는 뜻밖에도 할머니의 발병, 치매의 시작 때문이었다. 

   고향집에서 더 이상 혼자 생활할 수 없을 정도가 된 할머니의 부양 문제 때문에 큰아버지, 고모, 이부異父 삼촌들 모두가 우리 집에 모였다. 치매 증세가 시작된 할머니를 누가 모실 것이냐를 의논하는 자리였다. 꽤나 긴장되는 자리였다. 아무도 말을 않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는데 어머니가 번쩍 손을 들었다.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병든 어머니를 장남이 모시면, 그것은 또 다른 다툼의 시작일 것입니다. 형제간의 오랜 어색함을 이제는 끝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큰아버지는 그 말에 꽤나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어쨌거나 할머니는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서 당신 인생의 마지막 십 이년을 보내게 되었다. 


   2001년 가을, 다음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라고는 아무도 몰랐던 그 해 추석, 뜻밖에도 큰아버지가 친척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예상도 못한 일이었고, 처음 경험하는 것이어서 꽤나 어색한 자리였다. 차례가 끝나고 식사를 마친 다음, 친척 가족들이 함께 모인 거실에서 큰아버지가 잠시 동안의 망설임 끝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꽤나 긴 서사였지만 우리 모두는 조용히 들었다. 얼추 한 시간이 넘는 긴 이야기 끝에 큰아버지는 결국 소리를 내서 울었다. 그리고 흐느낌과 함께 가족들에게 말했다.

   “여기 모인 우리 가족 모두에게 나는 큰 죄를 지었다. 정말 미안하다. 속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았는데, 나는 참 나쁜 인생을 살았구나.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큰아버지의 일흔 살 가을, 그날의 고해를 계기로 아버지의 형제들은 오랜 앙금을 떨쳐버리고,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뒤늦은 우애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 큰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더라면 나는 오늘 여기에다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큰아버지의 가족


   지난 7월 28일 오전 7시 30분, 큰아버지는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폐렴이 원인이었다.


   “별 것도 아닌데 자꾸 병원을 가자고 자네 형수가 그러네. 이삼일 쉬다가 옮세. 다음 주에 형제회兄弟會 모임 있는 것 잊지 말게.”

   “그 연세에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한 며칠 푹 쉬고 오세요, 형님.”

   스피커를 통해 들은 두 분의 대화였다. 그것이 두 분에게 있어 인생 마지막 대화가 될 것임은 적어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집 근처의 의원을 찾았던 큰아버지는 의사의 조언대로 다시 종합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사흘 만에 산소 호흡기가 채워졌다. 가족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코로나가 재 확산되는 시기였다.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고모는 애간장을 태웠다. 

   “기침 조금 나온다 하더니만 그걸로 호흡기라니……”

   큰어머니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났다. 절망적인 이야기가 또다시 전해졌다.

   “의사가 마지막을 준비하라는데 어떻게 하노?”

   전화기 너머의 큰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이쪽의 어머니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입원한 지 21일 만에 큰아버지는 요양 병원으로 옮겨졌다. 증세가 호전되어서가 아니라 그곳은,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준비하는 마지막 정류장이라고 했다.


   큰형의 연락을 받은 늦은 저녁, 요양 병원 집중 치료실로 달려갔다. 몰라보게 야윈 채로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큰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젖힌 채, 호흡기에 의존해서 가쁜 숨을 겨우 내쉬고 있었다. 지난봄까지만 해도 자전거를 타고, 명절이라고 다 같이 윷놀이를 하던 큰아버지였다. 아흔이 넘었지만 근력은 여느 청년 못지않았다. 그래서 지금 내 눈앞에 누워 있는 사람을 큰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침대 곁에 선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님, 얼른 일어나 집으로 갑시다. 동생들이 다 왔는데 계속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합…”

   아버지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다음날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큰아버지는 어린 내 생일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보이면 성큼 다가와 허리 뒤로 감추었던 로보트며 축구공 따위를 내밀었다. 그런 모습을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축하한다며 형님들과 형수님들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내 기분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칠 무렵, 아버지의 전화기가 울렸다. 아버지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서도 쉽사리 전화를 받지 못했다. 화면에 뜬 이름이 ‘형수님’이었기 때문이다.

   

   폐렴으로 입원한 지 불과 26일 만에 큰아버지는 고운 가루가 되어 고향 마을 뒷산에 뿌려졌다. 자식들, 손주들 귀찮게 하고 싶지 않으니 절대로 묘墓를 쓰지 말라는 생전의 말씀 때문이었다. 




   9월 14일은 큰아버지의 49재四十九齋 중 마지막 제사가 예정된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아버지는 베란다에 놓인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살며시 뒤로 다가가니 딱히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형님한테 하고 싶었던 말, 쭉 적어봤다. 오늘이 이제 마지막이니까.”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아버지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오랜 세월, 남다른 애정愛情과 애증愛憎을 나누었던, 그래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친형에게 전하는 마지막 이별의 기록이기에 아버지의 눈물과 살짝 흔들린 글씨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이별기 離別記




* Image by yeon woo le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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