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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Apr 25. 2021

우리 집에 박평식이 산다

잘 읽었습니다. 제 점수는요


일요일의 고요함 사이로 아내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온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있는 듯하다. 곧 액자 하나를 들고 나오면서 아내가 깔깔거린다. “세상에, 이게 뭐야?” 아내의 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대체 뭐길래 저러는 걸까? 내 앞에 선 아내가 결국 한마디를 던진다. 


“이렇게 유치한 것이 지구 상에 존재했었구나.”



알고 보니 내가 고등학교 때 썼던 시화詩畵 액자다. 대체 이게 어디 있었지? 예전에 버린 줄 알았는데. 


당시엔 가을마다 학예회가 열렸고, 문예부원이었던 나는 시를 출품했었다. 액자를 소매로 훔치려니 30여 년 전 그 시절이 아련해진다. 그래도 그땐, 나름 꿈 많은 문학 소년이었는데.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서 아내에게 넌즈시 물었다. “어때? 잘 썼지?” 


그러자 아내가 웃음을 싹 거두면서 돌아선다. 그리고 한마디.


“어디서 감히 시 흉내를? 별 반 개!”


별 반 개라니! 이런 감동 파괴자를 봤나? 과연 우리 집에 박평식 평론가가 살고 있었구나. 정말 짜다.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 시가 팔리지 않는 시대, 그래서 시를 쓰지 않는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년에 시를 썼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러워 하자. 별 반 개? 상관없다.


귀로


흔들림 속에서

돌아오는

오늘 하루


도시의 바람이

스치며 켜놓은

이 거리의 이방인

행진하는 병사,

지친 병사들


달빛에 

노랗게 물드는

허수아비의 긴 그림자 -


수족관 속처럼

침묵하는

어두움의 군상들


또 다른 아침

기대를 안고

말없이 돌아오는

빈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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