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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y 10. 2021

사할린의 흑표범

들어간다, 눈 감아


러시아 사람 푼투초프 씨는, 부드러운 첫인상과는 달리 사흘에 걸친 회의 내내 자신의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온 우리들에게는 자신의 수산물을 절대로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거 꿈쩍도 않는데, 무슨 좋은 방법 없겠어?”


저녁 식사를 마친 김 부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입사한 지 백일도 안된 신입 사원인 내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김 부장이 중얼거렸다. “할 수 없지. 정공법으로 갈 수밖에.” 그러면서 구석에 놓인 면세점 쇼핑백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다음날 아침, 푼투초프 씨는 그래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술병이 가득 담긴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김 부장이 말했다. “오늘은 사업 이야기보단, 그냥 맛있는 한국 술이나 마십시다.” 곧 환하게 밝아지는 푼투초프 씨의 얼굴에서, 김 부장이 말한 정공법의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두 시간 즈음 지났을까? 정공법을 구사하려던 김 부장은 역공을 당해 한쪽 구석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고, 푼투초프 씨와 나는 심각한 내상을 숨겨가며 서로의 빈 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물건을 주세요. 싫다. 부탁입니다. 안 된다. 주량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였지만 그저 질 수 없다는 생각만이, 흔들리고 있는 내 몸을 겨우 지탱했다.


잔을 채우려던 푼투초프 씨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한국인이니까 너도 태권도를 할 줄 아는가?” 얇은 틈새로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빛을 잡았다. “당연하다. 블랙 벨트다.” 나는 한발 더 들어갔다. “태권도 국가대표였다. 원한다면 내가 지금 여기서 보여주겠다.” 한 발이 아니라 꽤 여러 발 들어갔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나는 그를 탁자 옆에 서도록 했다. 푼투초프 씨가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했다. 그에게 곧 팔짱을 끼라고 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건배를 외치며 부딪히던 유리잔 한 개를 그의 벗겨진 머리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나는 푼투초프 씨에게 또박또박 설명했다.


“나는 이제부터 내 몸을 공중에 날린 다음, 돌려차기로 너의 머리 위에 있는 유리잔을 정확하게 가격할 것이다. 만일, 내가 성공하면 너는 우리에게 너의 수산물을 팔아야 한다. 어떤가?” 안동 소주의 힘이었을까? 푼투초프 씨가 껄껄 웃으며 흔쾌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의 눈빛도 이미 정상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번 러시아 출장의 성패가 내 발 끝에 달린 셈이 된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술이 조금 깨는 것 같았다. 두세 번 다리를 들어 올려 거리를 가늠한 다음, 나는 다시 푼투초프 씨에게 다짐을 받았다. “성공하면 반드시 약속을 지켜라. 나의 러시아 형제여.” 엄지 손가락을 힘주어 곧추 세우는 것으로 푼투초프 씨가 대답을 대신했다. 


또 한 번 숨을 고름과 동시에, 나는 오른발로 땅을 박찼다. 몸이 가뿐하게 위로 솟구쳤다.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는데 사무실의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두터운 철문, 세계 지도, 러시아 국기, 술병이 놓인 탁자, 죽어가는 김 부장, 박제한 사슴의 머리, 그리고 푼투초프 씨의 웃는 얼굴. 그 얼굴이 보이는 순간, 나는 이때다 하며 다리를 쭈욱 뻗었다. 휙.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됐다. 성공이다. 


나는 깃털처럼 가볍게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후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이 녀석아. 장독을 깨면 어떡해? 아이고, 이를 어째? 박살이 났네, 박살이.”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자 그때까지 창 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던 김 부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도장이 찍힌 공급 계약서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김 부장이 또 혼잣말처럼 그랬다.


“역시 막힐 땐 정공법이야. 러시아 사람들, 술 엄청 세다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네. 그나저나 푼투초프 씨 머리에 저 붕대는 또 뭐야? 어디서 다쳤나 보지?”


물로 입술을 적신 김 부장이 내게 넌지시 말했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푼투초프 저 양반, 옛날에 유명한 소련 마피아였대. 실수로 자기 발을 밟은 부하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지 뭐야. 별명이 뭐였다더라? 그래, 맞다. 사할린의 흑표범.”


갑자기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도 비행기 안이 추워서 그랬을 것이다. 어서 빨리 러시아 상공을 벗어나고 싶었던, 1997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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