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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II제이 Apr 14. 2023

끈끈이주걱 (23년 4월 중순의 순간)

느리고 잠잠하지만 투명하다.

끈끈이주걱


  거실, 제일 큰 창문 앞 탁자에 끈끈이주걱이 있습니다. 그리 크진 않지만 짙은 녹색 잎잎이 눈을 더 밝게 해 줍니다. 이미 핀 주걱들에 붉은 잔털들이 달렸습니다. 그 끝에 맺힌 빨간 알갱이에 손을 붙였다 떼면 묻어나는 끈끈이는 투명하고 얇고, 그리고 생각보다 끈끈하지는 않습니다. 주걱에 붙은 죽은 날파리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끈끈이를 타고 며칠에 걸쳐서 주걱 속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줄은 서 있지만 동시에 들어갑니다. 이 오래 걸리는 이동 과정 앞에 줄이 길어질수록 끈끈이주걱을 보기가 어려워집니다. 파리들은 어디에서나 제일 눈에 먼저 띄니까요.      


  우리 집 끈끈이주걱은 먹고사는 일을 가장 밝은 곳에서 며칠 동안 마냥 보이고 있는 셈입니다. 끈끈이주걱의 먹방은 느리고 잠잠하지만 투명합니다.


  엉성한 일회용 플라스틱 화분에 심긴 세 뿌리의 끈끈이주걱. 한 뿌리가 말라죽어가고 있습니다. 셋이 지내기에 화분이 작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크게 자라는 것을 보면 아직 피지 않은 주걱들이 우선 길이를 늘이고 있습니다. 곧 안에서 잔털을 키우고 알갱이를 맺다가 며칠 더 지나면 피어날 것입니다. 아주 천천히 또 하나의 입을 벌리는 셈이지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지퍼가 풀리는 것처럼 잔털들을 하나하나 펼쳐내는 작업도 하루가 넘게 걸립니다.      


  줄기 아랫부분에는 그렇게 지내다 잎의 끝에서부터 시들어가며 지는 주걱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줄기 쪽으로부터 펼쳐지며 젖혀지고 끝내 바깥으로 휘어져 시들어 나가는 주걱의 한 주기(週期)가 지금 이 한순간에 한 번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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